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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이성 친구 (작은책)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중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들에게 줄곧 들어온 말은, 이성 친구가 아니라 동성 친구 같다는 말이었다. 남녀공학 중학교를 다니다 보니, 남자 애들과 심하게 장난을 치며 놀아 그런 것 같다. 20대 들어서면서 이래저래 알게된 친구들에게도 항상 듣는 소리가 '넌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편하다' 는 말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이러다가 정말 연애도 못하고 이성 친구들만 사귀다 마는게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 녀석들 중 한명과 러브라인이 그려져서 첫 연애를 해보기도 했지만, 이제서야 친구와 이성을 대하는 감정은 다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 제목 때문에 잠시 '이성 친구'들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상뻬의 글과 그림은 위트와 유머가 넘치기에 제목만 보고 대충 그런 분위기를 상상했다. 남녀 사이의 뻔한 사랑과 우정에 대한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면서 말이다. 43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줄 모르고 책을 펼쳤다가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한 장에 걸쳐 짧은 글과 그림은 다음 내용과 이어지지 않아 그 안에 남겨진 단상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몇 개의 단편을 읽고 또 읽고, 그림을 여러번 보았지만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단편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니, 편하게 보자하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읽다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책을 주로 읽었기에, 짧은 나뉨이 익숙하지 않았을 뿐 상뻬 특유의 독특함은 여전했다.
책 제목처럼, 이 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이성과의 사랑, 우정, 감정의 변화등에 대한 단편적인 잔상들이다. 거기에 상뻬의 그림은 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기 보다, 글에 대한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딱 드러맞는 상황이라는 느낌도 들었고, 보여지는 그림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이성간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해 봄직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지만, 좀 더 개방적이고 솔직한 글들이 많았다. 프랑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다르기에 느껴지는 이질감도 있지만, 마음 속 깊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드러내기 힘든 속 마음들이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공감할 수 있게 다가오기도 했다. 꼭 이성간이 아니더라도 글과 그림속에 나오는 상황들을 보고 있으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수탉이 하는 얘기, 어린 꼬마 커플의 이야기, 시련당한 남자의 이야기들은 심연 속에 감춰진 자신을 건드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한 번 보고 마는 책이 아니라, 자꾸 펼쳐보며 잔상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나의 기분에 맞춰 부담없이 펼쳐 볼 수 있는 책. 그런 책이 흔치 않기에 더 자주 들여다 봤는지도 모르겠다. 즐거울 때보다 조금은 센티멘털할 때, 깊은 상념에 빠질 때 들여다 본 적이 많았다.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책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독자에게 남겨진 것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툭 하고 던져주는 상뻬의 글과 그림에 당황하지 말고, 자신의 내면의 들여다 보면서 읽는다면 상뻬의 메세지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메세지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닐까. 남녀간의 여러 상황 속에서 나 혼자만 겪는 아픔이나 과정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이니 작아지지 말라는 그런 뜻이 가장 크게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상뻬의 글과 그림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