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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 일주 - 개정판 ㅣ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4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어렸을 때 TV 만화로 본 것과, 성룡 주연의 영화를 본 것이 다였다. 만화는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았고, 영화만 간간히 기억나는 정도였다. 책으로 읽어보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아 설레는 맘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보다 너무 흥미로워서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꼭 필요한 생리욕구(밥먹기,화장실)을 제외하고 정말 순식간에 읽어 버린 책이다. 단 몇시간의 여행이었지만, 80일동안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었다. 19세기 중반의 영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재미는 너무나 쏠쏠했다. 지금 세계여행을 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짜릿하고 흥미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 관광이 아닌 발자국 남기기에 불과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수 많은 난관과 짜릿한 흥분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때는 1872년, 벌링턴 가든스의 새빌로 가 7번지에 살고 있는 필리어스 포그는 꼼꼼하고 과묵한 신사다. 그의 생활은 단순하지만, 정확한 틀에 짜여있고 몸담고 있는 클럽은 혁신클럽 하나 뿐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신문을 보고, 토론을 하며 지내는 그는 어느 날 위험한 대화에 말려든다. 80일만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기사로 대화를 하다가 2만 파운드를 걸고 내기를 한 것이다. 그는 행동하는 신사였으므로, 정확한 도착 시간을 알림과 동시에 2만 파운드 수표를 남겨 놓고 이제 막 그의 하인이 된 파스파르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즈음 런던에서는 은행에서 5만5천 파운드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의 몽타주가 곳곳에 뿌려지게 되었다. 포그의 내기가 런던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의 주식까지 등장하자 그 사건을 맡고 있던 형사 픽스는 범인과 너무 닮은 몽타주와 내기 배경을 섣부르게 추측해 포그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포그와 파스파르투 둘만의 여행이 아닌 픽스가 은밀하게 따라붙은 기묘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각 나라에 들러 여권 사증을 받아야 했으므로, 정확한 도착 시간과 함께 다음 탈 것과 시간이 꼭 맞아야 했다. 포그는 80일 안에 온갖 잡다한 역경을 포함한 시간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지만, 과연 포그에게 세계 곳곳의 운송편이 호의적일지 의문이었다. 포그는 이동할 때마다 자신의 수첩에 여행에 소요된 시간만 표기한다. 포그가 보았던 신문에서도 역시 이동하는 공간을 소요 시간으로 나타낸 것이였으므로, 어떠한 일이 닥쳐도 포그는 여행한 시간과 남은 날짜만을 계산하며 초인적인 인내심과 기지를 발휘한다. 시간을 벌거나 잃어도 침착하기 그지 없었고, 수 많은 난관이 닥쳐와도 그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를 거쳐, 아시아, 아메리카 다시 런던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답답해 보이기도 하고, 내기를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말을 아끼고 아꼈다. 그러나 그는 예정되어 있던 교통수단을 놓치거나 예기치 못한 재난이 닥칠 때, 아낌없이 거금을 들여서 교통수단을 마련했다. 그가 내기를 염두해 두지 않았다면 그런 행동을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여행을 하는지 지켜 보기만 하면 되었다.
포그는 여러나라에 들러도 관광을 하지 않았다. 파스파르투를 시켜 필요한 물품을 사오게 하고, 심지어 관광도 하인이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동을 할 때마다 늘 사건은 터졌다. 인도를 여행하던 중에는 교통수단이 끊기자 거금을 주고 코끼리를 구입 하기도 했다. 밀림을 건너다 남편이 죽어 아내를 같이 화장하는 '사티' 풍습을 목격하게 된다. 너무도 아리따운 인도 여인이 가여워 그들은 꾀를 내어 그녀를 구한다. 그때부터 미망인 아우다는 세계일주에 동행하게 되고, 포그의 신사적인 태도와 겉모습과는 다른 따뜻한 마음씨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었고 난관은 끊기지 않았다. 형사 픽스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그들을 어려움에 빠뜨리기도 하며, 파스파르투는 아편굴에 빠져 중국에서 포그와 헤어지게 된다. 다행히 파스파르투와 포그는 일본에서 재회하게 되지만, 픽스는 끝까지 따라 붙는다.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영국령을 벗어났기 때문에 체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영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행지는 미국이었다. 드넓은 미국 땅을 여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개척중이었기에 철도가 완전히 깔리지 않은 곳이 많았다. 기차 여행 중 인디언들에게 습격을 받아 파스파르투를 비롯해 같이 싸우던 사람들이 잡혀가자 용감하게 구하러 나선 사람이 포그였다. 결국 뉴욕에서 유럽으로 가는 배를 놓친 포그 일행은 거금을 주고 선원들을 매수해 선장을 선실에 가두고 영국으로 향한다. 중간에 연료가 떨어지자 선장에게 배를 통째로 사고, 배의 목재 부분을 태워 연료로 써버린다. 이처럼 포그가 돈을 물쓰듯이 낭비하는 장면은 수시로 목격 된다. 코끼리를 구입하는 장면에서도 그랬고, 얼음위를 달리는 배를 탈 때도 그랬다. 계산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때 어떠한 교통수단이든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은 조금은 껄끄러웠지만, 그는 80일만에 세계여행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해 영국에 도착한 포그 일행은 혁신클럽까지 가는 과정만 남겨 놓았을 때, 최악의 난관에 당면한다. 그동안 졸졸 따라다니던 픽스가 결국은 포그를 체포한 것이다. 감옥에서 머무르는 동안 런던으로 가는 기차는 떠나버리고, 보석금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혁신클럽에 가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포그는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아우다의 앞날을 걱정했지만 뜻밖에 아우다의 청혼을 듣게 된다. 둘은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파스파르투를 시켜 신부님께 부탁을 하러 보낸다. 신부님께 심부름을 간 파스파르투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르러 포그에게 오고,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았다며 빨리 혁신클럽으로 가라고 말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포그는 헐레벌떡 달려가고,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는 혁신클럽 회원들 앞에 제시간에 나타나므로 내기에 이기게 된다. 포그는 지구를 동쪽으로 돌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를 번 것이다. 서쪽으로 돌았다면 하루를 잃었을 여행이 그런 우연으로 인해 내기에 이기게 되었다. 내기 금액은 2만 파운드였지만 여행 경비로 1만9천 파운드를 쓴 포그는 얻은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아우다가 있었다. 포그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만한 결말이었다.
책 내용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선으로 본다면 케케묵은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쥘 베른은 급변하는 세계를 손바닥 안에 놓고 글을 쓴 것처럼 생생한 묘사와 풍부한 사건들을 삽입해 재미를 더해주었다. 샤르통의 잡지 <세계일주>에서 많은 경험을 빌려와서 썼다고 하지만, '지구가 작아졌다'는 포그의 말은 80일동안의 세계여행으로 증명된 셈이다. 책을 읽는 동안 빨려 들었던 세계여행은 무척 즐거웠다. 모험으로 가득찬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막 마친 것처럼, 내 몸이 뻐근한 것 같다. 쥘 베른의 다른 모험을 간택(?) 하는 시간을 갖으며, 잠시 숨을 돌려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