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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상뻬 책을 읽고 있으면 어린시절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은 사람들이 잘 믿지 않지만, 어릴 적 나는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말도 못 붙였고, 누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움을 많이 탔었다. 그런 어린시절이 떠올라서인지 이 책 제목만으로도 왠지 친근했다.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랄까. 그런 설렘과 호기심이 제목을 대한 순간부터 나를 지배했다.
꼬마 마르슬랭은 얼굴이 빨개지는 병에 걸렸다. 모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거나 겁을 먹을때 자주 얼굴을 붉힌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마르슬랭은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졌다. 정작 얼굴이 빨개져야 할 상황에서는 빨개지지 않았고, 친구들이 자신의 붉은 얼굴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자신의 얼굴이 왜 빨개 지는지 마르슬랭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르슬랭은 자신이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왜 자신의 얼굴이 빨개지는지 궁금해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얼굴이 빨개져서 집으로 돌아오다 계단에서 재채기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한 꼬마 남자 아이를 발견했다. 소년의 이름은 르네 라토였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재채기를 하는 아이였다.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르네에게도 희한한 병이 있었으니, 쉴새없이 재채기를 해대는 병이었다. 둘이 친해질 수 밖에 없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둘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딜 가든 서로를 찾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들에겐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재채기를 해대는 것이 서로를 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신호가 될 정도로 특별한 우정을 나눠 갔다. 말 없이 한참을 앉아 있어도 푸근한 사이가 되었고, 외톨이로 보냈던 시간들을 메꿔나가듯 둘은 신나게 지냈다. 그러나 마르슬랭이 할아버지 댁에서 일주일 정도 방학을 보낸 후, 르네 집을 찾아가니 그 사이 르네는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 마르슬랭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마음이 많이 상했다. 르네가 주소를 남겼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시간이 흐른 뒤 마르슬랭은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마르슬랭은 르네를 잊지 않았다. 나이가 먹어 어엿한 어른이 된 후에도 말이다.
마르슬랭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여전히 얼굴을 붉혔고, 많은 일을 하며 복잡한 대도시에서 생활했다. 어느 날 마르슬랭은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떤 남자가 계속 재채기를 해 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르네 라토였다. 그 둘이 만난 순간을 저자는 능청을 떨며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들은 자주 만났고,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 처럼 짖궂은 장난을 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들의 아들들이 얼굴이 빨개지고 재채기를 해대며 주변을 뛰어 다닐 때 조차도.
처음에 마르슬랭의 사연이 펼쳐질때만 해도 다소 우울한 결말을 예상했었다. 분명 보통 사람과 다른 아이였기에 사람들의 차별 속에서 살아갈 거라고 속단했었다. 그러나 자신과 조금은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 르네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한다. 중간에 헤어지기도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난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너무 뿌듯했다.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예전의 우정을 되찾을 수 있었고, 더 깊어갔다. 늘 그렇듯 달랑 글만 있었다면 감동이 적었을 이야기에 데셍을 집어 넣으니 감동은 배가 되었다. 조금은 독특한 두 사람이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고 다시 만나기까지 상뻬의 데셍이 없었다면, 단지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렸을 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데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의 감동이 깔려 있었기에 훌륭한 조화를 이뤄낸다고 상뻬를 칭찬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