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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스케치 ㅣ 장 자끄 상뻬의 그림 이야기 3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내 책장에 읽을 책이 엄청나게 쌓여 있으면서도 상뻬의 책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리를 하면 안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결국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상뻬의 책을 두 권을 주문하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뿌듯하던지. 이번에는 어떤 세계를 만나게 될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책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 손에 책이 쥐어지자 마자 순식간에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말았다.
다른 책들에 비해 하드커버에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파리 스케치>는 제목 그대로 스케치로 채워져 있다. 간간히 어디를 배경으로 그린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곁들어 있긴 하지만 그 외에 저자가 쓴 글은 없다. 온전히 파리를 스케치한 광경에 녹아들어야만 한다. 그림이 없는 글은 상상할 수 있고, 글과 그림이 함께 있다면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글이 없는 그림은 온전히 독자가 채워야 한다. 유화도, 사진집도 아닌 스케치이기 때문에 파리를 내려다 보고 있어도 실재의 파리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케치이기에 가능한 친근한 감정과 동시에 나의 어설픈 지식속의 파리가 아닌 다른 세계의 파리를 만나야 했다. 파리를 직접 가보지 않았기에 스케치 만으로는 실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상뻬는 파리를 온전히 옮기려는 의도가 아니였기에 복잡한 생각 없이 편하게 보면 되었다. 파리를 배경으로 그려졌다는 사실감은 어느 정도 존재하더라도 상뻬 특유의 독특함이 들어가 있기에 틀에 박힌 파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상뻬의 스케치는 얼핏 보면 무척 복잡해 보인다. 건물과 사람, 자동차들이 뒤엉켜 있는 파리는 숨쉴틈 하나 없어 보인다. 그렇게 복잡한 스케치를 그리고도 물감을 입히지 않은 것에 의문이 갈 정도로 상뻬의 스케치는 섬세하다(종종 색깔이 들어가 있는 스케치도 있지만). 그가 그려놓은 스케치에 감탄을 하기 전에 섬세함에 놀라 전체보다 부분을 보기 바쁘다. 그런 독자의 의도를 간파했는지 상뻬는 거대한 스케치의 구석이나 중간에 재미난 그림을 그려놓기도 한다. 높은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신사의 모습이라든가, 건물 사이로 겨우 들어오는 햇살을 쬐고 있는 숙녀등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웃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단순하게 파리의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면 식상했을지도 모를 그의 스케치에서 절대 눈을 뗄 수 없는 이유이다. 과장된 모습에서 나오는 익살, 상상력을 동반한 일상들이 구석구석 놓여 있어 글이 없는 심심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만난 파리의 모습은 경외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보고 싶지만, 낯설기 때문에 조금은 두려운 곳. 그러나 상뻬의 스케치로 만난 파리는 무작정 갖게 되는 동경을 주지 않는다. 동경 대신 나의 상상속에 존재하는 도시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려 하기도 한다. 도시여서 갖게 되는 불편함들도 당연함을 받아들여지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 가운데서도 여유를 찾는 일부분의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정지된 그림속의 일부분이었기에 마음껏 상상할 수 있었다. 종종 실재의 파리의 모습을 진하게 나타낸 스케치들은 나의 갈망을 자극하기도 했다.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책을 본다든가, 작은 공원에 앉아 차를 마시는 모습들이 그랬다. 꼭 파리가 아니더라도 나의 일상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고 싶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파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파리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떠한 매체를 통해서든지 파리를 그대로 재연해 낼 수 없을 것이고, 직접 가서 느낀다고 할지라도 파리는 이런 모습이다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좀 더 다른 파리, 새롭게 만날 수 있는 파리를 기대하며 상뻬의 스케치를 만난다면 즐거움이 배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스케치 속에 상뻬만의 파리가 재탄생 되기 때문이다. 상뻬의 파리가 궁금하다면 햇살 좋은 찻집에 앉아 이 책을 펼쳐놓고 빠져 보길 권한다. 꼭 카페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파리 속에 집어 넣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분명, 색다른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