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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군가를 짝사랑 할 때, 그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상대에게 향하는 뜨거운 마음으로도 부족할 터인데, 그 사람에게 애인이 있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한 걱정으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절벽을 기어 올랐다 한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나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 진다. 말 한마디에 용기와 상심을 갖는 것은 물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고 느끼기에 이른다. 하지만 누군가를 마음 한 가득 품은 마음만큼 설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그 사랑이 좋은 결실을 거두면 좋겠지만, 한 사람을 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색깔이 바뀐다. 짝사랑에 대해 이렇게 길게 늘어놓은 건, 선배의 결혼 축하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를 본 후로 사랑에 빠진 주인공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눈에 띄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정면으로 파고들어 대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가 익숙해지기를 기다린다. 그 과정은 처절했다. 단지 그녀를 쫓거나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간 것 뿐인데, 이상한 일들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거기다 그녀가 필요로 할 때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늘 어긋나서 그의 존재는 묻혀졌다. 정작 그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위기가 사라진 후라 그의 모습이 더 위기일 때가 많았다. 오히려 눈에 띄기만 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그녀 앞에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은 그녀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라기도 아닌, 그와 그녀의 이야기도 아닌 그녀의 이야기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그녀 앞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웠다. 엉뚱한 사람들과 만나고, 얽히는 천방지축인 그녀는 한 곳에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거기다 그녀가 얽히는 사건들은 모두다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판타지 적인 소재와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낮보다는 밤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그녀를 처음 알게 된 밤은 작가의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였다.
가끔 날을 새다보면 밤의 세계는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잠들어서 눈을 뜰때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지만, 막상 날을 새어보면 그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는 밤은 낮보다 더 짙은 내면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그랬다. 환타지 적인 요소가 주를 이루어도 밤이였기에 수긍 할 수 있었다. 전설적인 애주가 이백씨와 술 마기시 승부를 하는 그녀를 만났던 것도 밤이었다. 밤이였기에 승부가 가능했고, 그녀의 엉뚱함과 발랄함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 뿐만이 아닌 밤의 세계에 익숙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독특하게 볼 수도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녀가 빛을 바랬고, 그도 그녀의 곁을 멤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와 다르다고 다가가지 않았을 그녀 곁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와 조금 다른 생각, 행동들을 하더라도 진심이 깃들어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도 그녀를 진실하게 대했다. 그녀를 뒷받침 해주는 사건들과 주변 사람들이 환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지만, 정작 가장 환상적인 요소는 그녀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너무 그녀에게 빠져 그의 존재를 잊지 말기 바란다.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보면 독자재연을 운운하며 그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온통 뺏겨버렸는데, 재기발랄한 그녀에게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할 것인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억지스레 자신의 마음을 전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지고지순한데가 있었다. 그래서 끝까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애쓸 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 노력이 처절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또 만났네요"라고 건넬 뿐이다. 그와 그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드디어 그녀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변의 도움도 있었지만, 늘 자기 곁을 멤도는 선배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녀의 눈에 띄려고 애를 썼고, 그녀는 자유스럽게 청춘을 만끽했기에 가능했다. 오로지 자신의 마음만 드러내려 했다면 절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어딘가 존재할 법한 밤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주력한 것 같은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강하게 들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일본소설은 "일본답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특했다. 무엇이 쟁점이다라고 콕 찝어낼 수는 없지만,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고 온 기분이다. 깊은 밤, 나의 존재를 잊고 다른 세계를 만끽하고 싶을 때 빠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