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 바다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꿈을 꾸었다. 나는 바다 한 가운데 떠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거쳐 온 기분이었다. 꿈을 꿨다 생각하니 내 주변이 낯설긴 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현실감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꿈을 꿨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던 책, <표류>였다. 기나긴 사투가 담긴 이 책을 꿈이라고 우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 남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지극한 현실이었다.

 

  책을 열기 전에 지은이가 바다 위에서 76일을 표류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비극을 맞이할 필요도 업었고, 망망대해에 구명선과 한 남자를 띄워놓고 책을 읽기만 하면 되었다. 결말을 알아서인지 저자가 걱정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서툰 배에 관한 용어라든가 바다에 관한 이야기, 매끄럽지 않은 문체 앞에 토를 달며 어서 결말이 다가오기를 바랐다. 나 역시 위험한 레이스에 나간 저자가 이해되지 않았고, 저자의 배 솔로 호가 침몰했을 때까지도 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저자가 처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지에 대한 궁금증 밖에 없었다. 솔로 호가 침몰한 순간부터 76일을 꼬박 채우기까지 그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 진부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저자에게 처해진 위기가 단순한 경험담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상어들이 공격을 해 대는 밤이였을까. 구명선의 바닥이 구멍이 날 때 였을까. 아니면 물고기 사냥에 실패해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던 날이였을까. 그런 처절함 때문에 위기를 받아들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모습에서 였다. 어떻게 76일을 버틸 수 있었냐는 질문에 '죽는 것보단 그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 저자는 표류 기간 동안 늘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해버려도 어느 누구하나 탓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살아남았다. 바다에 대한 지식이 일반인 보다 나았다 하더라도 순간의 대처능력과 자신을 타이르는 법, 자제하는 법을 터득했기에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만새기를 잡아 먹으며 목숨을 연장했고, 증류가 되다 만 바닷물을 마시며 버텼다. 절망이 그를 심해 바닥까지 끌고 간 날도 많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섣불리 앞날을 지레짐작 하지 않았다. 이 책에 씌여진 시간 외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저자의 고통, 외로움, 두려움이 충분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의 구조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당면한 하루하루를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구조되는 날이 다가올수록 그에게 힘을 내라는 고요한 외침보다 먹먹한 것이 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인간의 극한 상황에서의 모든 면을 서슴없이 보여 주었기에 그동안 함께 표류를 했던 시간들이 하나의 설움으로 다가왔다. 그 설움의 극에는 만새기가 있었다. 만새기는 고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지만 툭하면 보트 바닥을 들이 받고, 작살을 피해 갔으며 저자를 조롱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구조를 돕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런 만새기를 저자는 친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명선을 따라다니는 만새기 한마리 한마리를 구별할 정도로 서로의 사정을 알았기에 살상을 저지르는 것조차 저자는 두려워 했다. 그렇게 지내온 만새기들이 어부들의 눈에 띄었다. 갈매기들이 구명선 위를 멤돌았고 구명선 아래에는 저자와 긴 시간을 함께 해 온 만새기 떼가 있었다. 그리고 물고기를 찾아 온 어부들이 구명선을 발견했을 때의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서슴없이 어부들의 배에 낚여가는 신세가 되었다.

 

  만새기 이야기는 저자의 경험에서 일부분을 차지 한다. 그보다 더 큰 발견은 항해를 통해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은 자신의 이야기라기 보다 바다의 신비와 마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표류기간 동안 펼쳐지는 현실은 혹독하면서도 장엄했다. 경험보다 값진 깨달음은 없다고, 저자는 그 후의 삶이 달라졌다. 자신의 경험이 뭍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기쁠거라는 말 뿐이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저자에게 처해졌던 위기를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다 위에서 보냈던 76일의 사투를 통해 단순한 동행이 아닌 또 다른 삶을 경험한 것만은 분명하다. 위대한 자연 앞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 남아준 저자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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