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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평점 :
예기치 못한 이별이 닥친 후, 그 사람과 찍은 한장의 사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 오던 날. 읽다 만 존 버거의 책을 꺼냈다. 처음 이 책을 마주 했을 때, 사진이 없는 것에 당황했었다. 당연히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존 버거의 글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물끄러미 책만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사진을 글로 쓴 것이 아니라 글로 사진을 썼다는 책 제목이 보였다. 제목이 주는 미로에 잠시 주춤거리며 책을 읽어서인지 존 버거의 글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마주한 사람과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울기도 하고 대화도 많이 하고 이 책을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과 낯섬에서 마주하는 감정은 첫 출발부터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존 버거의 글이 나오기 전에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 책에서 유일한 사진이며, 이 사진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글을 읽고 다음 글에서 나타나지 않는 사진들에 익숙해 지라는 염려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형체만 있을 뿐 흐릿한 사진 한 장으로 존 버거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첫 장에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긴 하지만, 그 사진을 참고만 할 뿐 저자는 사진 속에 글을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글을 읽어 나가면서 한 장의 사진을 만들어 내려는 내 자신을 발견 하게 된다. 책 제목에 충실하려는 듯 사각틀 안에서만 새로운 세상을 만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던 것이다.
저자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지만 굳이 얽메일 필요는 없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의 묘사가 자연스레 그려진다면 글을 읽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머릿속에 한 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상을 만들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글을 읽다 보면 저자가 마주한 일상에 폭 빠지게 되지만 좀 더 상상력을 더해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면 사진 밖의 세상도 볼 수 있다. 또한 내가 지금껏 만나지 못했던, 어쩌면 앞으로 만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알고 있는 사람들, 혹은 스쳐지나가면서 바라보게 된 사람들, 몇 마디의 대화로 알게 된 사람들을 우리가 만날 기회가 있을까. 우리가 만났다 하더라도 그들의 외적인 면만 보았을 뿐, 저자처럼 그들의 내면까지 파고들 수 있을까. 한 장의 사진 같은 일상을 통해 타인에 대한 동경을 품어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어쩜 저자가 전해주고자 하는 의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존 버거를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얽혀 있어야 할 우리인데 내 안에만 갇혀 너무 팍팍하게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럼없이 타인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대화하며 내면을 파고들 수 있는 저자가 부러운 이유였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둘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성찰적 시각을 키울수 있던 던 시간이 소중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보여지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어떤 사물을 시각을 통해 인지하는 것이 아닌 저자의 글과 독자의 상상력을 보태서 만들어 지는 새로운 시각이라고 말이다. 그게 어떠한 것(사진이든,영상이든)이든 저자와 독자 개개인이 만들어낸 하나의 독창적인 모습이다. 사진이 없다고 당황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저자는 자신의 경험이 깃든 사진을 독자의 상상력과 맞물리도록 유도해 새로운 포토카피(사진복사)를 선물한 것이다.
이제는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마주한 사람과의 사진을 보며 슬퍼하지 않는다.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과 나의 모습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사진 밖의 상황을 추억하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사진 틀 속에 헤어짐을 가두는 것보다 하나의 영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난 것이다.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고 해도 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수 많은 사진들이 존재하기에 두렵지 않다. 이 책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추억을 읽을 수 있는 힘. 사진 밖의 흐름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각. 더불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까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진은 많기에 현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