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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코페르니쿠스 - 뿔 모던클래식 6
존 반빌 지음, 조성숙 옮김 / 뿔(웅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해질 무렵 바다에 나갔다. 만조의 바다는 파도에 부딪히는 물결과는 또 다른 장관을 그려 내고 있었다. 바다를 찾았을 때 나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나름대로 고정시켜 놓았던 내 마음이 무너져 버렸기에, 그 마음을 들쳐낼 수 없었기에 절망을 안고 바다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바다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다. 최근에 읽은 책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세상을 향한 절망감과 불신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쌩뚱맞게 바다에 나가 왜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 안의 절망감으로 인해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이해 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허구로 채워졌다 해도 저자가 만들어 내는 주인공의 내면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자신이 닥터 코페르니쿠스가 되어 세상을 바라볼 것이고, 닥터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동안 살아갈거라 생각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속으로의 공간이동에는 성공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내면 속으로 온전히 들어갔다고는 생각되어 지지 않았다. 소설이기에 주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비춰줄 거라는 나의 생각은 철저히 외면 당했다. 저자 스스로가 이 글의 성격상 코페르니쿠스의 온전한 전기로 보는 것은 전혀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존 반빌이 그려내는 코페르니쿠스는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을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그의 삶이 차근차근 전개 되는 과정에서 그가 지동설을 주창하게 되는 시기로 들어가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역동적일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 에서는 그를 특별하게 만들지도 않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청년 시절을 보냈던 로마와 피렌체의 음울함은 그의 인생 전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예감할 수 있었다. 평생을 가톨릭 수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면서 천문학자, 의사이기도 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생각이 이 세상에서 관철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동설을 주창함으로 인해 외부의 핍박이 도드라지게 나타날거라 예상했지만(외부의 핍박이 없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피폐한 내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독자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실패작 이라 여겼던 그의 방어 때문이었다.
그의 평생의 결과물인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일한 제자 레티쿠스 때문이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고 있었던 때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기에는 그도 두려웠을 것이다. 레티쿠스의 설득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동설을 온 세상에 알리기에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가 숨을 거두던 날, 출간된 책을 보면서 파기를 요구했던 것 처럼 그는 평생을 지독한 고독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의 주창을 가설이라고 얕보던 사람들과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괴로움이 책의 출간을 미뤘는지도 모른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한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냉철함이 부족 하듯이 세상이 자신의 주창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바꿔갈지 그도 알 수 없었기에 내면의 혼란은 당연했다.
전기소설로 이 책의 장르를 나누기 전에 코페르니쿠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존 반빌의 섬세하게 펼쳐지는 언어의 유희를 따라가기에는 녹록치 않기에 흐름을 읽기 보다는 순간순간을 저자가 그려내는 고독에 맡겨버리는 것이 더 편하다. 그의 글을 다 읽고 났을 때 비로소 한 인간을 그려내는 방법이 독창적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자가 만들어 내는 혼란의 늪 속에서 이끌림을 받다 보면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추악하지만 아름다웠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만조의 바다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떠올렸던 것은 절망 그 자체를 보듬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코페르니쿠스의 고독을 알아 갔다는 사실이 내 안의 절망을 누른 것은 아니였을까. 그가 낱낱이 드러낸 절망과 두려움에서 용기를 얻었기에 바다는 내게 가만히 귀 기울이라고 말해 주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