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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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버거를 알게 된 건,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 라는 책에서였다. 생각 외로 철학적이였던 <건축에게 시대를 묻다>에서 존 버거의 글이 간간히 나왔던 것이다. 언뜻 봐서는 존 버거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해 한 것 같으면서도 수긍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직접 읽어봐야 겠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그의 글이 눈에 밟히면서 책 제목을 메모해 두었고, 지인이 책을 사준다고 하기에 덜컥 사달라고 했다. 처음엔 관심 있던 책이 내 손에 쥐어져서 흥미로웠지만, 책장을 열고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덮어 버렸다. 도무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다시 그의 책을 꺼내 든 것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현실적인 책을 읽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서 였다. 단지 책이 얇다는 이유로 내 책장의 수많은 책중에서 선택된 책이였지만, 읽기를 몇번이나 포기한 책이라서 약간의 두려움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받아 들일 것 같았던 호기심이 팽배한 때에 이 책을 만난 탓인지 그의 글이 몽롱하게나마 나에게 와 닿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읽는 순간 잊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그 순간을 느끼지 않으면 잊어 버리는 흡인력은 약하면서도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내며 파고드는 그런 글이였다.

 

  존 버거의 글에서 첫 번째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은 글 자체가 아니라 글의 형식이였다. 글의 형식이라고 하니 내가 그의 글을 평가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글 안에서의 형식이 아니라 글이 묶여진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수 많은 책들에 의해서 소제목, 단락의 구분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문단의 띄움으로만 구별 되어 있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그의 글이 낯설었다. 내가 이 책을 받아들고 나서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 아마 일관성 없이 흩뿌려진 그의 글이 아니였나 싶다. 그러나 그 형식의 자유스러움을 받아 들이고 나면 비로소 글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하는 말들을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에 어느 정도의 수긍을 하며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 페이지나 내키는 대로 펼쳐서 읽어도 무관할 정도로 자유스러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이 형식 없이 묶어졌다고 했지만,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나뉨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읽었지만, 1부는 시간에 관한 글이고 2부는 공간에 관한 글이다. 그러나 이런 소제목을 생각할 틈도 없이 펼쳐지는 그의 글 속에서 허우적 거리기 바빴다. 소제목을 던져 주긴 했지만, 그 안에서 저자가 넘나드는 장르는 무궁무진 했다. 그의 직업을 보면 기록하기가 벅찰 정도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비평가, 소설가, 사회 비평가 등 활동하고 있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박학다식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식을 드러내는 박학다식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박학다식이라 읽는 나조차도 거대한 무언가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또한 시를 즐겨 쓰기도 하고 자주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의 시는 기존에 알고 있던 시들과는 다른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 진실이 더 드러나는 듯한 느낌이였고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눈 앞에 펼쳐지는 막막함이 더 거대해 지는 기분이였다. 그가 <시는 지금 이 순간의 고통받고 있는 상처에 대해 말한다>라고 했듯이 그의 고통이 내게도 전해졌으며, 그 고통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랬던게 아닌가 싶다.

 

  낯설게 만난 그였지만, 그의 글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이 있는 글, 미술 작품에 대한 통찰, 시와 어우러지는 상처. 그리고 자신이 펼쳐놓은 거대한 생각의 바다에 맘껏 누리도록 해주었던 그의 세계. 그 세계에서의 허우적거림이 좋았다. 한 문장을 읽고 깊은 사색에 잠기며, 깊은 밤에 읽어도 외롭지 않고, 아껴서 읽고 싶은 글. 그것이 바로 존 버거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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