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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또 한번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와의 만남을 생각해 보게 된다. 예전에 루이스 세풀베다의 <핫라인>을 서점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를 읽고 단박에 매료되어 저자의 다른 작품을 염두해두다 가장 읽고 싶었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루이스 세풀베다에게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별 감흥없이 지나쳐 버렸을 작가. 어떤 작가와의 첫 작품의 만남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계기였지만, 정말 괜찮은 작가와 작품은 꼭 만나게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험이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루이스 세풀베다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지만, 나를 가장 매료 시켰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문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그의 문체의 간결함 때문이 아니였나 싶다. 그다지 두꺼운 책이 아니였음에도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성과 문체는 현실을 잊고 빨려 들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신비하면서도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정글이 무대가 되었으니 호기심은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끌어 내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에 끌려 다니면서도, 어느 정도의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과정의 흥미로움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한 노인의 삶과 밀림에서 펼쳐지는 인간과 동물의 싸움은 비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만들어 가는 세계에 온 마음을 맡긴 후 손을 털어 버리는게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극이 나를 옥죌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존 밀림의 엘 이딜리오에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노인이 살고 있다. 그는 그곳의 원주민이 아님에도 삶의 터전을 찾다 수아르 족과 함께 살게 된다. 부인을 잃고 홀로 된 몸이였지만 수아르 족의 끈끈한 의리와 자연의 냉철함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잊은 채 살아 왔었다. 수아르 족은 그에게 정글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 주었고, 수아르 족을 떠났을 때는 그들의 삶의 지혜가 묻어 있는 모습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정글은 점점 황폐해져 가고 많은 사람들이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을 때는 나약한 노인이 되고 말았다. 치과의사가 가져다 주는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이 낙이였던 그는 밀렵꾼 시체의 출연으로 자신이 지켜왔던 평화가 깨지는 것을 감지한다.
밀렵꾼의 시체로 인해 동물에게 인간들의 위협을 받고 있다 생각하는 엘 이딜리오의 읍장은 그에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밀려꾼의 시체를 보고 원주민들이 죽였을거라 우기던 읍장 앞에 살쾡이의 짓이라고 정확하게 추리한게 화근이었다. 약아빠진 읍장은 인간이 동물들에게 해를 끼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미쳐서 날뛰는 살쾡이를 제거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나 밀렵꾼에 의해 새끼와 숫컷을 잃은 암살쾡이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노인 혼자서 살쾡이를 제거하러 떠나면서 긴강은 고조되고 비극적인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는다. 밀림에 살면서 동물들을 사랑하게 된 그는 암살쾡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감하게 된다. 읍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암살쾡이가 인간에 대한 복수를 할 뿐이라 생각했지만 노인은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픔을 분노로 표출하는 암살쾡이에게 다른 사람들이 원했던 제거적인 죽음을 선사하면서도 그는 승리감에 젖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부조화의 비극이였기 때문이다.
간결한 문체 속에 드러나는 수 많은 표면들. 그것은 인생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슬픔이기도 하다. 그 모든 감정을 내포하며 읽어야 했던 나조차도 긴 시간을 살아온 기분이 들 정도 였으니 현장의 씁쓸함을 이해하겠다 감히 말할 수 없다. 황폐해져 버린 정글이 더 많음을 분명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의 의식 가운데 신비함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는 착각이었을 것이다. 착각 속의 간절함은 무참히 깨트려주는 소설을 통해 피하고만 싶었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해를 끼치는 존재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