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만나는 조정래님의 작품이다. 대하소설과 문학전집만 보다 한 권으로 된 책을 손에 쥐니 나도 모르는 허전함에 잠시 당황을 하게 된다. 이 한 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실이 익숙치 않아서 두려운 마음까지 밀려왔다. 다음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읽기를 자꾸만 미루게 만들기도 했다. 더군다나 조정래님의 소설은 우울함을 배제할 수 없기에 더욱더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그러나 책을 펼치고 보니 나의 걱정은 헛되었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한번의 멈춤도 없이 빨려들 듯 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자의 필력을 걱정했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면돌파. 그의 소설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단숨에 읽어야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왜 조정래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군더더기 없는 문체 때문이라고 말한다. 걸리적거림 없이 미끄러지듯 뻗어나가는 그의 글을 읽노라면 소설 속의 상황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곤 했기 때문이다. 인간 연습을 앞에 두고 처음의 불안한 마음은 그런 숙명 앞에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인간 연습 속에는 전향한 장기수들이 등장한다. 그런 장기수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던 것은, 몇 년 전에 본 다큐멘터리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에 대학내에서 상영했던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경험이 있는데 그때의 느낌이 생생히 살아난 기분이었다. 내가 보았던 것은 영상이었기에 저자가 써내려가는 상황의 뒷 얘기가 저절로 그려지는 느낌. 그 느낌 속에서 비전향 장기수와 어떤 이유에서건 전향한 장기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 처절함을 소설 속에서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았지만, 영상으로 본 전향한 장기수들의 삶이 또렷이 떠올라 훨씬 더 고달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윤혁은 전향한 장기수다. 전향을 했으니 장기수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그의 전향은 질병 때문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박동건도 고문을 받다 기절한 사이 지장이 찍혀 전향을 했듯이, 전향한 장기수들에게는 각각의 사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연은 억울함이라 해도 용납되지 않았다. 비전향과 전향의 차이는 극과 극이었으니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상처와 울분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박동건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는 북한의 실태를 의심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는데, 북한을 다녀 왔다는 한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속에 지녔던 신념이 무너져 버린다. 그러나 윤혁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송한 사건을 보며 박동건이 죽기를 잘했다고 되뇌인다. 어찌되었든, 자신들은 북한으로 절대 갈 수 없는 전향한 장기수들이었기에 그 사실을 모르고 간 박동건을 부럽다고 쓰디쓴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북송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그들의 보습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영웅 대접 받은 그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첩으로 내려와 오랜시간 감옥살이를 하며 그들이 지켜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사상 가운데에 조국은 있었지만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그러나 사상의 변절이 없다해도 전향을 한 사람들은 냉대했다. 설사 끝까지 전향을 하지 않은 장기수들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삶을 누리기에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 졌고, 그들의 조국은 자신들이 사상을 품고 남파했던 그때의 조국이 아니었다. 그 사실들을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또 다른 제 3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건, 비전향한 그들이나 전향한 그들이나 똑같았다. 그들이 살아야 할 땅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그나마 윤혁은 다른 전향자들의 거친 삶보다 조금 나았다. 형사의 감시하에 살아가긴 하지만 번역이라는 소일거리가 있어서 입에 풀칠하는데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를 통해 삶의 또 다른 맛을 찾아가고 있었다. 죽은 박동건에게 이런 아이들이 있었다면 사는게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품어 주게 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정도로 아이들은 삶의 의미가 되고 있었다. 팍팍할 것 같은 소재 속에 아이들을 등장 시키면서 희망의 터를 열어주고 있다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 자서전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고아원 원장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남은 일생을 보낸다는 것. 그것은 윤혁에게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연습이라고 할 정도로 또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기회가 되었다. 지금껏 타인의 삶을 살았으니 서툴더라도 자신의 삶을 일궈가는 것. 그것이 자신의 문학에서 분단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던 저자처럼 개개인에게 던지는 메세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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