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큼의 애정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다. 공연도 볼겸 지인도 만날 겸 나선 길이였는데, 이동 시간이 길어 힘들었던 기억만 난다. 일부러 책 읽기 수월한 기차를 택했는데, 올라가는 길에는 한 줄도 읽지 못하고 잠만 자버렸다. 내려 오는 길도 무척 피곤 했지만 잠으로 보내기는 싫어서 억지로 책을 꺼내 들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보상을 받으려 펼친 책이었는데, 피곤함도 잊은 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창 밖의 풍경은 하나도 보지 못했지만 기차의 이동과 함께 책이 흘러가는 기분. 그런 기분 가운데 내 마음은 잔잔해져 갔다.

 

  처음 책 제목과 겉표지를 봤을 때, 쿨한 로멘스 소설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다시 살펴 본 겉표지는 책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은 잔잔하면서도 틀에 박힌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다. 겉표지는 그렇다치고, 책을 읽는내내 독특하다 느꼈던 것은, 주인공 마사히라에게 일어난 일들은 평범한 것이 아님에도 수평선을 그리듯 써 내려간 저자의 문체였다. 페이지는 중반을 넘어가고 결말을 향해 감에도 처음과 별다를 바 없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결코 흥분하지 않았다. 독자에게는 그런 부분에서 인내가 필요할지는 몰라도 저자가 뿜어내는 독특한 잔잔함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 또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의혹도, 툭 하고 던져 버리는 결말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사히라에게 얽힌 궁금증을 해소 시켰따는 후련함보다, 수평선처럼 일정한 문체에서 빠져 나왔다는 후련함이 더 짙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나이지만, 이 책은 평이 극과 극으로 갈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너무 허망하다는 쪽과 나처럼 저자가 끌어내는 잔잔함에 어느 정도의 매력을 느꼈을 쪽으로 나뉠 거라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의 스토리는 그럴 여지를 주기 충분했다 생각한다. 마사히라는 옛 애인 아키라의 전화를 빌미로 5년 전 자신을 떠났던 배경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간다. 그런 과정 속에서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마음을 닫아 버렸던 자신을 돌아 보면서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자 아키라에게 마사히라와 헤어지길 요구했던 어머니, 그런 마사히라를 위해 기꺼이 떠났던 아키라, 자신에게 괜한 참견을 했다 생각했던 키즈 선생. 그 모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오로지 마사히라만 마음의 문을 닫은 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5년 전 아키라를 자신에게 떼어 놓게 했던 사람들을 원망해 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키라를 향해 조금씩 용기를 낸다.

 

  그런 마사히라를 지켜 보면서 내 마음도 복잡해져 갔다. 좀 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과거의 행동은 차치하더라도 키즈 선생을 통해 마음의 병페가 벗겨지는 부분에서 찔림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사랑을 믿지 못하고, 나의 것을 지킬 줄 모르며, 나를 다스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비단 마사히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든, 나에 대한 애정이든 그 가치를 따질 수 없기에 좀 더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 안에 가둬놓은 것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그 갇힘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 하고 있었던가. 마사히라에게 아키라와 헤어진 이후의 5년이 그랬다. 아키라의 배신에 허덕였던 것보다 자신 안에 갇혀 있음을 괴로워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마사히라를 보면서 자신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한발짝 떨어져 나와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은 없는가, 똑바로 가고 있는가를 정검해 봐야 할 것이다. 나에게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범하는 오류도 무척 많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더라도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때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면서 5년의 세월을 번민으로 보낸다는 것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사히라는 5년의 세월이 힘들었지만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한 마음을 알았기에 지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조금씩 다가가는 마사히라. 그런 깨어남이 비단 마사히라 뿐만이 아니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