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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그래 - 파리 ㅣ 여행그림책
이병률 지음, 최산호 그림 / 달 / 2025년 10월
평점 :
약 두 달 전, 2주 동안 뉴욕 여행을 갔었다. 모국어를 쓰지 못한 철저한 이방인에 불과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맨해튼을 걷고 있으면서도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선이 제약적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정보들은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집을 떠나 이 먼 곳에 와서 낯선 곳을 걷고 있고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현실감은 없었지만, 이 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지금은 두렵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라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제한적일 테지만 분명 집으로 돌아가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나도 돌아올 거야. 이 정도의 여기라면. 85쪽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했던 뉴욕 여행이어서 그런지,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지하철과 길거리의 온갖 냄새로 강렬하게 기억되는 뉴욕은 한국과 자꾸 비교하게 만들었다. 비싼 물가,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은 듯한 거리의 사람들, 도시의 소음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단일 언어는 나를 더 혼미하게 했다. 그랬기에 다시 뉴욕에 올 일이 있을까 의문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파리를 좋아하고, 그곳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들과 자잘한 인연을 맺고,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모습이 나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 도시를 사랑하고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걸까? 파리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라고 해도, 예술가들만 파리를 사랑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왜 그토록 낯선 도시가 낯설게만 느껴지고 즐기지 못했는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시간이 우리를 잠시 막고 있을 뿐.
시간은 당신의 모든 가능성을 숙성시키는 중이라고. 21쪽
파리에 있는 ‘카페 팔레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근처 국립고등미술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아지트라고 한다. 저자는 이 카페 주인이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유를 가난한 학생들에게 주인은 가끔 와인과 음식을 건넸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에게 가진 것은 그림뿐이고, 줄 수 있는 것 또한 그림뿐이니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곳을 오가는 수많은 잠재적 예술가들에게 ‘시간은 당신의 모든 가능성을 숙성시키는 중이라고’ 말해준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 가능성에 부디 나에게도 와 닿았으면 싶었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마흔에 겨우 파리에서 첫 책을 출판한 헨리 밀러처럼 나이는 정말 숫자일 뿐이라고, 나에게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거라는 위로의 말처럼 들렸다. 다만 내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구체적이지도 않고, 시도도 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속에 무언가가 소용돌이 치기를 조금은 무모하게 기다리고 있다.
어렴풋이 뉴욕에서 저자처럼 여유롭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관광객임에도 언어가 통하지 않았을 뿐, 충분히 맘 놓고 즐겼을 법도 한데 나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 자체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내 능력으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고, 내 안의 수많은 가능성과 뉴욕 도시가 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접목 시키지 못했다. 여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꼭 무언가 결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데, 무언가를 얻으려고만 하고 그 자체를 여유롭게 바라보지 못했다. 나도 저자처럼 뉴욕을 여러 번 경험하면 골목골목을 기억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 생길까?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 없이 오롯이 파리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익숙해야만 편안한 것이 아닌 낯섦과 익숙함이 주는 설렘과 편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와인부터 창가에 심겨진 꽃 이야기, 공원에서 받은 낯선 이의 달콤한 생일 선물까지 꼭 저자의 경험만 녹아 있는 게 아니라 파리 시내에 바람처럼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노래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수다 같은 이야기를 몽롱하면서도 편안하게 들었다. 잔뜩 움츠러든 강직성 대신 유연하고 어떤 상황이든 내면을 거쳐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여유와 편안함과 마주했다.
파리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간다 해도 저자처럼 이런 시선으로 그 도시를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각자 자신만의 렌즈로 바라보는 세상이 천차만별로 쌓이는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그러다 렌즈 안에 더 기억되게 하고, 간직하고 싶은 세상이 있을 것이고 그럴 때 다시 돌아올 거라는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여운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보다, 어느 날 선물처럼 남겨진 여운이 현실과 이어진다면 그게 더 행운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현실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후회 없이 하루를 이겨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