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옥편 - 한문학자의 옛글 읽기, 세상 읽기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이벤트 책들에 치여서 정작 내 책들을 읽지 못하는 답답한 독서의 연속이었다. 내가 좋아서 신청한 책임에도 기간 내에 읽고 리뷰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독서의 의미조차 잃어가는 상황이기에 이벤트를 줄이고 그 동안 묵혔던 책들을 조금씩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미미했지만 많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비로소 내가 제대로 책을 읽는 것 같았고, 많은 이들에게 선물 받은 책들을 꺼내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책도 선물 받은 책들 중 하나였다. 온라인으로 인연을 맺게 된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책임에도 오랫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의 진가는 더 발휘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준 책이였고 평안한 상태였으니 책의 내용이 내게 쏙쏙 들어올 수 밖에.

 

  정민님과의 만남은 이번이 두번째다. <책 읽는 소리>를 통해 옛 선인들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느꼈었다. 그래서 저자의 신간이 나왔다고 하기에 지인에게 말해서 받은 책임에도 이제서야 꺼내 보는 나의 손길이 부끄러워 진다. 비단 이제서야 꺼내는 마음만 부끄러우랴. 책을 읽고보니 현재의 내 삶에만 치우쳐 마음속에 허영만 채웠던 시간들까지 부끄러운 것들 투성이었다. 이 책에는 <책 읽는 소리>보다 좀 더 다양한 저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옛글을 읽다 읽지 못할 풍경을 실은 글, 논설적인 성격의 글, 생활 속의 단상, 선인들의 독서와 단상에 대한 글들을 담고 있었다. 10년동안 쓴 글을 모았다고 해서인지 창작의 흔적보다는 편안함이 지배적이었다. 너무 빨리 읽혀 멈춤을 의도해야 할 정도였고, 멈춤 속에서는 놓쳐 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지금은 그다지 생각 나는게 많지 않다. 소소한 에피소드만이 기억날 뿐이다. 책을 읽었음에도 어찌 기억나는게 없을까 한탄을 해보지만, 오래지 않아 결과보단 과정의 책이었기에 이런 느낌이 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읽는 소리>처럼 과정이 더 벅찬 책이었다. 많은 공감을 끌어 내지 못했더라도 한 두 가지의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박혀있는 느낌. 그 느낌들이 이 책의 전부다라고 말하지 못해도 내게는 책의 전부를 기억하는 것보다 소중하다는 기분이 든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옛글의 행간>과 <책 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다. 그 중에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스승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만들었던 글이 생각 난다. 한문학자인 저자가 석사논문을 권필의 한시로 준비할 때, 시를 번역해서 스승께 보인 일이 있었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라는 부분을 스승이 말이 많다며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줄이게 하는 장면에서 나는 심히 부끄러워져 버렸다. 평상시에 불 필요한 말은 얼마나 많이 했으며, 책의 느낌을 남기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잡설로 채우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지금도 얼굴이 화끈 거린다. 또한 차근차근 짚어 주며 가르침을 주었던 저런 스승이 분명 하나쯤은 있었을 터인데, 무조건 밀쳐내 버렸던 내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안타까움과 후회로 책을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책 읽기와 글쓰기> 부분에서 또 한번 무너지고 말았다. 지식인들의 언어 꼬기의 실상을 보면서였다. 그런 글을 만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들의 글을 찬사하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글의 횡포를 눈치 채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거기다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한 때 이순신의 연인이었던 여진의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을 다섯장을 썼다가 '내다 버려라'로 일축 했다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저자의 글에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그득했다. 그랬기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는 저자도 스승의 옥편을 다리미로 다리며 조심조심 보는 이유가 이러한 부끄러움이 내제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스승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채워갔던 스승의 마음을 잃지 않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몇몇 이야기를 통해 스며드는 저자의 아릿한 마음들이 내게도 번져와 잠시 스산해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마음들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시 내 곁으로 오지 못한다고 해도 저자가 느꼈던 아릿함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 그리고 앞으로의 내 삶 속에도. 너저분한 잡설로 채워 나가는 나의 글이지만, 그 느낌들을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너그러이 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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