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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상페
장자크 상페 지음, 양영란 옮김 / 미메시스 / 2023년 8월
평점 :
오랫동안 이 책을 들고 다녔다. 책이 읽히지 않은 시기였고,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생기지 않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랬으니 아무리 책을 들고 다녀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저자의 그림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나만의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주말 저녁 혼자서 이 책을 들고 카페에 갔다. 평상시 같으면 후루룩 읽어 버릴 책을 얼마 동안 읽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달랑 이 한 권만 들고 갔는데, 금세 읽어버렸다. 문득 시계를 보니 카페 문 닫을 시간이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여분의 책을 들고 오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다시 책을 읽을 힘을 생겼다.
이 책은 그가 자주 찾았고, 어쩌면 일생을 보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97쪽
옮긴이의 설명처럼 여기에 실린 삽화들은 예전에 그려진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상페가 쓴 글이 아닌 상페와 함께 일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상페에 관해 쓴 글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본 상페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삽화들인 센트럴 파크를 그려낸 작품들이었다. 지금 보고 있으면 너무나 당연한 풍경 같은데 상페가 이 삽화들을 그려낼 당시만 해도 센트럴 파크는 우범지대였다고 한다. 그래서 흥미로운 일화 중 하나는 상페의 이런 삽화가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센트럴 파크의 리모델링을 담당할 그룹이 생는데, 그들이 상페가 보여 준 삽화와 비슷하게 공원을 탈바꿈 했다고 한다. 상페가 센트럴 파크에 엄청난 꿈을 심어준 셈이다.
오늘날 그리니치빌리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보보스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없다. 모든 것은 변했다. 본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 재기 넘치는 상페의 그림과 노래는 길이 남아서 이 전설적인 거리에, 우리의 젊은 날의 거리에 여전이 울려 퍼질 것이다 78쪽
이 책은 장자크 상페 별세 1주기를 추모하며, 상페가 미국을 여행하며 그려 낸 작품과 그를 기리는 칼럼들을 함께 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경만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상페 특유의 매력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럼에도 이 책이 좀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이란 나라에서 기꺼이 도전한 것이다. 1969년의 여름, 미국이 달 표면에 내딛는 첫발자국의 현장에도 상페가 있었다. 케이프케네디 특파원의 글의 끝에는 ‘자, 상페, 자네의 펜과 붓으로 자네가 경험한 아폴로호를 우리에게 보여 주게나.’라고 되어 있다.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상페 역시 자기만의 색깔로 드러내는데, 상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의 감동을 끌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라 상페가 해석한 달 탐사에 대한 그림들은 상페다웠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에게 우주는 현재의 ‘나’와 ‘우리’ 그리고 인간이 연결된 것으로 느껴졌다. 우주도 내가 존재해야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으니까. 내 멋대로의 해석일지라도 인간의 존재감을 소소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그림들이 우주라는 공간보다 더 광활했다.
내가 왜 상페의 그림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본다. 엮은이는 ‘거창하고 고매한 세상이 아니라 소소하고 자잘한 소시민적 세상인 만큼, 많은 독자와의 공감 가능성은 더욱 커 보인다.’라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공간적, 문화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상페가 우리나라의 정서를 그려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상페가 전달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행복. 게으름을 피우며 느지막이 일어나 과일을 조금 먹고,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정경화(바이올린)’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상페의 삽화를 들춰보고 짤막한 느낌을 쓰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오늘 하루의 행복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