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버텨!
장자크 상페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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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손길을 주지 않았던 책장에서 네 권의 책을 뺐다. 그리고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다. 책 제목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전에는 와닿지 않았던 책 제목이 오늘따라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저자 특유의 유머와 그림들이 나를 평안하게 해주었다. 내가 요즘 들어 방황했던 이유가 일상을 잃어버려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오롯이 마주할 힘. 그 힘을 나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다.

난 요즘 들어 혼자서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걸 깨달았어. 22쪽

혼자 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집에서도 혼잣말을 자주 하지만 밖에서도 종종 내 생각에 빠져 혼잣말을 하다 당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지하 주차장에서 무언가를 기억해 내서 큰 소리로 말했는데, 입구에서 사람이 걸어왔다. 또 중얼거리며 분리수거를 하는데 경비아저씨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던 때처럼 혼자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자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단단해진 내 마음을 예전에 느꼈던 평안함이 비집고 들어와 빈틈을 만들어 주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배경을 내세워 돋보이게 만드는 일. 그들의 얼굴과 내면을 모두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리의 일상을 그대로 그려낸 것 같아 그 모든 게 삶의 일부분처럼 느끼게 해주는 힘이 있다. 특이한 동작을 하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전시회를 보고 나오는 부인이 하는 “난 어째 몸이 좀 얼얼해.” 라던지 사람이 바글바글한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를 멀찍이서 냉소적인 표정으로 “어쨌거나 굉장히 프로 같긴 하네!” 라는 글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위안을 받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평범함에서 오는 공감일지는 몰라도 생각이 돋보일 수 있음에 생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까? 획일화되지 않은 감상평에서 살아있음을 경험했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저자가 그려내는 일상의 매력이고, 특별함이다.

뭐라고? 이제 겨우 시작되어 외울 것도 없는데, 역사 시험에서 빵점을 받았다고? 37쪽

이런 그림과 글은 허를 찌른다. 구석기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에서 아빠가 아이의 시험지 같은 무언가를 보며 하는 말이다. 그 아래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저 시대에 시험과 종이와 글이 있었냐, 역사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는 걸 어떻게 아냐는 의문의 진지함을 제외한다면 방심하고 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는 독자에게 한 방 먹이는 것 같은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런 신선한 발상만 표현한 것이 아닌 인간 내면의 속물적인 부분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림도 있는데, 그런 기질을 나 또한 버릴 수 없어서인지 오히려 시원하게 드러내는 그들이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아무런 글도 없는 몇몇 그림도 독자로 하여금 대화하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지금처럼 온 들판이 녹음으로 뒤덮인, 시골길 어디선가 보았을 그런 풍경에 죽어가는 나무가 서 있는 그림이 있다. 거기에 정원사 같은 사람이 그 나무를 쳐다보며 조리개를 들고 발을 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무런 말이 없지만 여러 가지 대화가 가능하게 한다. 평범하게 따지면 “저 나무는 왜 죽어가지?”부터 저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너무 일찍 옷을 벗었군!” 정도가 될까? 익숙하지만 낯섦을 맞닥트리는 시선이 공존하는 듯한 기분도 좋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그림과 정서에 맞지 않는 대화와 생각의 나열들이 있어도 그대로 수용한다. 저자의 모든 글과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며, 이해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게 또 다른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꺼내보아도 평안한 게 저자의 작품집이고, 그런 평안한 분위기가 내 기억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분간은 구매하고 읽지 않는 저자의 작품을 좀 아껴서 만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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