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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집을 나서면서 가방에 꼭 챙기는 것은 책 한권과 cdp다. 걸을땐 음악을 듣고, 멈출땐 책을 꺼내든다. 그렇게하면 어디에서건 내게 익숙한 분위기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이어폰을 빼거나 책을 덮고 고개를 갸웃거리노라면 익숙하던 곳들도 낯설게 느껴진다. 내 세계에서 너무 깊이 묻혀 있었다고 해도 그런 단절이 고립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풍경을 색다른 광경으로 볼 수 있는건 세상과의 단절을 잠시 만들어 낼 때 가능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병률의 산문집 '끌림'은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세상과의 단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였다. 나라면 스쳤을 것들, 나였다면 우울함에 빠져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여행지에서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그런 느낌들은 꼭 저자가 있었던 곳의 정황들이 아니라, 그곳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많았다. 여행의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리는 것보다 자신에게 고백적이 글들이였기에 더 좋았다. 여행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여행은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함이면서도, 같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홀로 서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건 내 자신과의 대화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대화를 저자는 거침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자가 뱉어내는 언어가 거칠었다거나 다듬은 흔적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여행하면서 이런 글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박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였다. 여행지 속에서의 스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 혼자 있더라도 외로움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저자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였다.
그러나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방황이라는 걸 방관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고백적인 언어 속에서 저자의 생각을 낱낱이 볼 수 있었으니 그에게 느껴지는 일말의 두려움을 지나칠 수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해 순간순간의 두려움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두려움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렵고 떨리면서도 헤쳐 나가보고 싶은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또한 여행은 순간순간의 두려움 속에서 또 다른 이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보면 저자는 그런 두려움을 어김없이 남겨 놓고 있었다.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책장을 넘기는 손이 허탈하거나 맥이 풀려 버릴때가 있다. 여행지의 이야기든, 저자의 이야기든 저자의 글에서는 남겨진 이별이 많았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둘러 책장을 넘기면 다른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그러면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멍하니 책장만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사람에게 내 마음을 비추지 못하고 떠나 보내 버린 것처럼 주저 앉고만 싶었다.
그런 마음이 더 허망한 것은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섞인 두려움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고 사려져 버린 소년, 자신이 팔아야 할 옥수수를 건네는 청년, 한국인 아버지를 두고 있지만 전쟁 이후로 만난적이 없다는 베트남 사내.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고 다시 돌아간대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별은 더 허무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온전히 독자에게 남겨 주었던 저자는 여헹에서 만날 수 있는 잔여물을 그대로 전해준 셈이다. 낯선 곳에서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만나고, 나의 존재가 감사함으로 전해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는 사실에 벅차오를 수 있도록 그 모든 것을 남겨짐을 통해서 보여 주었다. 그 남겨짐이 서글프지 않은 것은 새로운 만남이 있다는 것을 책을 덮을 즈음에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마음을 이리저리 요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저자의 문체이다. 여행의 기록들이기에 여행 에세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울림이 너무 깊었다. 자잘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들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멈춤을 드러내는 저자의 글은 나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내가 길을 잃어 버려도 일어설 힘이 없어도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붙들어 주며 가식적인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모습은 두려움이 나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는 그런 두려움과 맞서고 싶어서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두려움과 마주칠 때가 많지만 나 혼자만의 두려움이 아닌 세상과의 타협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행을 하면 두려움이 사라질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과 막막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보고 있노라니, 여행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진정 두려워 해야할 것은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아버린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