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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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녀는 도대체 이 모든 먼지가 어디서 나올까를 궁금해하면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먼지를 턴 그 친숙한 물건들을 빠짐없이 훑어보며 방 안을 빙 둘러보았다. 「이블린」중

아이들을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 뒤에 거실을 치웠다. 늘 그렇듯이 거실만 대충 정리하고 테이블에 앉아 책도 읽고, 오늘의 할 일들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막상 앉고 보니 오후 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거실을 청소하면서 서재방의 엉켜있는 내 책들을 보니 한숨이 나와 요리조리 피할 수 있도록 다시 책을 잘 쌓아두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얌전히 앉았어야 했는데, 괜히 찬장을 열었다가 마스크, 그릇, 반찬통까지 정리하고 베란다로 나갔더니 무당벌레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서 모두 쓸어 창밖으로 보내주고(1층이라 창문을 열면 바로 땅이다), 분리수거까지 하고 오니 오후가 돼버렸다. 그러고 나서 마주한 이 문장이 오늘 나의 일과를 잘 말해주는 듯 해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책만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더블린 사람들』의 녹록치 않았던 읽기 과정이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첫 단편「자매」를 읽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바로 해설을 펼쳤고, 해설이 없었다면 이 책을 끝까지 못 읽었을 거란 확고함이 들었고, 어쩌면 저자의 문학세계는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읽기 전까지 지금껏 그래왔듯 여전히 책의 우주를 하염없이 누비면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나섰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우연히 이 책을 읽고 뒤늦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을 찾았다며 그때에야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책이다.


작가의 체취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몰개성적인 작가라고 부를 수도 있는 조이스의 작가의 초연성 이론에는, 작품은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작품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_해설 중


저자가 주장한 ‘초연성 이론’에 철저히 외면당한 나였지만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 해설 덕분에 ‘작품 스스로 자율적으로 생산된’ 느낌을 갖지 못했지만 저자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게 되었다. 이 계획을 이해한 이면에는 해설자의 생각에 도움을 받았으므로 ‘초연성 이론’에는 들어맞되, 그것을 지켜본 또 다른 독자의(나를 비롯해)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설가 역시 ‘열린 텍스트는 의미를 포착하기 어려워서 아무리 노력해도 독자들 간의 해석상의 일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작품’ 이라고 했으니 전지적 독자의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렬했던 것은 저자가 ‘열린 문학을 실현하기 위해 개발한 획기적인 기법’이었다. 특히 ‘현현(epiphany)의 기법,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저자의 문학이 난해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고(특히『율리시스』), 이 작품을 통해서 충분히 느꼈으며 무엇보다 ‘20세기 이후의 지구촌 문단의 거장치고 그의 위업에 열광하지 않은 작가가 드물 지경’이라고 하면서 언급한 작가들이(T.S 엘리엇, W. 포크너, E. 헤밍웨이, F. 피츠제럴드, S. 베케트, 근래에 와서는 T. 핀천, U. 에코, S. 류수디, O. 파무크 등) 너무나 익숙했다. 저자의 ‘새로운 문학 기법’을 차용한 다른 작가들의 작품만 실컷 읽어오다 이제야 우두머리격인 ‘제임스 조이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마치 실컷 감시당하며 살아오다 나를 감시하던 존재, 즉 문학계의 ‘빅브라더’를 만난 기분이랄까?


이 코딱지 같은 집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갤리허처럼 멋지게 살아보려 노력하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작은 구름」중

저자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내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궁핍감이 물씬 물씬거리는 스타일로’ 쓴 아일랜드 소시민의 삶에서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더블린은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수도 가운데 하나였고, (…) 어떤 예술가도 이를 세상에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더블린을 무대로 세계문학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또「작은 구름」,「어느 어머니」를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파넬의 서거 후 영국이 정치적인 감시와 탄압을 강호하자 아일랜드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문화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국민적인 일체감을 유지하려 한 민족주의 운동) 허점을 폭로했는데, 아일랜드만의 ‘독자적인 민족 문화를 수립하는’ 목적을 하나의 코미디로 치부하면서 ‘마비’라는 잠에 빠진 시민들의 잠을 깨우기 위한 목적에 철저히 부합한다. 오히려 문예부흥운동보다 ‘영국의 통치 아래 신음하는 더블린의 치부를 세상에 널리 폭로하여 조국의 발전에 촉구’하기 위해 쓴 이 작품이 아일랜드를 더 널리, 낱낱하게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저자가 ‘개척한 열린 문학에 필요한 문학 기법을 성공적으로 창출’ 했고, ‘동포들의 정신적 병폐를 낱낱이 들추어 조국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는 사실에 이 작품의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은 ‘우리를 위선과 마비에서 해방시키려는 예술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발전의 가능성은 상상마저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말할 정도로 고속 성장의 밑바탕에 이 작품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인지『더블린 사람들』들의 순환적 구조가 제목과 내용을 더 자유롭게 만든다. 특히 첫 단편「자매」와 마지막 단편「죽은 이들」제목을 바꿔서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어떻게 읽어도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신적, 물질적, 사상적 ‘궁핍’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잘 읽히는 책이 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설이 없었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열린 문학 기법에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을 이해하게 된『더블린 사람들』을 읽었으니 악명 높은(?)『율리시스』를 읽어보려 한다. 부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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