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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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이 행복의 기준이 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머뭇거리다가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시원하게 인정하자 싶어 여행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준비 자체부터 피곤하다고, 잠은 집에서 자고 반나절 정도 나들이가 딱 좋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이 금지가 된 현재는 조금 후회도 된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 때 돌아다닐 걸. 뭐가 그리 피곤하다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는지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곳을 가는 게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을 갈 때가 많은 듯하다. 나 좋다고 하는 여행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67쪽

어쩌면 여행뿐만 아니라 일상의 대부분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도움을 받고자 타인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은 좋은데, 과시가 일상이 되어버리는 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개인의 즐거움을 과시로 오해하지 않게 되면서 나 또한 여행을 가게 된다면 남들이 가는 곳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겠노라고 찜해둔 곳이 몇 군데 있다. 해외 문학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 지명이 뇌리에 꽂히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텔아비브, 지브롤터 해협, 파타고니아 등이다. 순전히 발음이 주는 매력 때문인 것 같은데, 실망 혹은 혼란을 느끼더라도 이 책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더 가보고 싶게 만들어줬다.

여행을 아예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을 만나다 보니 의외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대리여행을 해준 책들은 많이 만나봤지만 여행준비 단계를 즐기는 책은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취미가 뭔지 몰랐다던 저자처럼 나에겐 독서가 그러한데, 읽은 책도 꽤 되지만 읽으려고 쌓아둔 책이 더 많은 것과 비슷해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준비가 취미가 되면서 화제가 풍부해져 이야깃거리가 많아진다는 저자의 말에(아쉽게도 책은 여행보다는 이야깃거리가 한정 되는 게 서글프다) 부럽기도 하면서, 집에서도 즐겁게 여행 루트도 짜고 심지어 가보지도 않은 곳을 타인에게 추천하고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생생함이 대단했다(어느 회사 대표와의 미팅을 앞두고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 여행 얘기를 꺼냈고, 직접 노르웨이를 다녀 온 그 분과 여행지 얘기를 실감나게 했지만 정작 가본 적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 더 화기애애 졌다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여행준비를 즐길 정도라면 저자가 ‘플렉스’했던 경험이 분명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외로 <세계 최고 식당의 자격>이라는 에피소드에서 나오는데, 정말 이런 곳이 존재하고 가 본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생경했지만 무척 재미있었다. ‘플렉스’한 경험은 미슐랭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식당을 찾아가는 것인데, 예약 자체가 어렵고 복잡한 것은 둘째 치고 예약 오픈이 열리자마자 품절 되는 게 낯설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이 미식가들에게 ‘성지’ 중 하나라는 것도 그렇고, 정말 우여곡절 끝에 그런 식당을 가서 음식을 맛보고,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받고 온 경험을 보면서 정말 ‘찐’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다고 말한 나도 설득되어 가능하다면 인생에 한 번은 저런 경험을 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였다(아, 이래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곳을 무조건 무시할 수 없는 건가?).

여행준비의 가장 큰 장점은 여행이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추억이 풍성해지는 거다. 여행을 앞두고 그 나라 말을 조금만 공부하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다. 36쪽


이 책의 힘은 진정성이었다. 여행이 목적이지만 삶 곳곳에 퍼져있는 여행의 의미가 잘 녹아있어서인지 다양한 접근이 좋았다.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김영하 작가가 말해준 가장 사치스런 독서인 현장독서(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을 읽으러 작품의 배경이 된 영국 요크셔로 가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_이하 <랄랄라 하우스> 중에서)가 저자에게 미슐랭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식당을 방문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장소에 여행을 가서 좋아하는 또 다를 것을 행하는 것(저자는 스포츠 관람)처럼 여행지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기념품을 모으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정신을 붙들 수 있었던 건 독서였고, 책의 종류에 따라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의 열정이 선한 영향력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지명을 찾고, 그곳을 가보기를 꿈꾸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무슨 책을 읽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이왕이면 내가 잘 모르는 나라의 지명이 나오는 낯선 책을 만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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