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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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이었다. 아버지 기일이라 친정에 가는 길이었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4학년 때 이미 분교가 되었고, 폐교된 지 오래되어 현재는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지나치며 집까지 걸어갔던 길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에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은 멀어서 지름길인 산길을 통해 통학했다. 그렇게 불쑥 꺼낸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 친정에 도착해서 제사 음식을 대충 준비해 놓고 언니네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가봤다. 


그 길은 꿈에 자주 나타났다. 해는 떨어져 캄캄한데 나는 그 길을 혼자 걷고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족히 한 시간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 나는 막막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자꾸 그 길이 꿈에 나오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길을 좀 더 또렷이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길은 그 자체로 감격스러웠다. 뭉클해서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날 뻔 했다. 분명 내가 걷던 그 길은 엄청 넓고 끝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좁고 나무들이 우거진 오솔길에 가까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5년 만에 와보는 길인데 그 길을 보자마자 모든 기억이 올라왔다. 나와 10살 차이가 나는 언니도 그 길로 학교를 다녔던 터라 내가 길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내자 언니도 자신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네 잎을 넘어 일곱 개나 달린 클로버를 찾았던 장소며(이건 진짜다), 다슬기와 송사리를 잡으며 올라왔던 개울, 집까지 한참이 남았는데도 용 발자국이 찍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에서 물놀이를 하고(그래서 통학길 이름은 용선골이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남의 텃밭에서 무와 고구마를 캐서 먹었다. 그때는 시골의 정이 비교적 넉넉했던 시기라 들켜도 어른들이 크게 뭐라 하지 않았다.


두메산골에서 자란 터라 양은 도시락에 점심을 싸서 다녔고, 겨울에는 일찍 도착한 사람이 난로의 맨 아래 도시락을 놓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래서 집으로 오는 길에 도시락 통을 씻어 다슬기를 한껏 담아왔다. 그러면 그날 저녁 후식은 다슬기가 되었다. 엄마가 다슬기를 삶고 있으면 마당 울타리 탱자나무의 뾰족한 가시를 꺾어 그걸로 다슬기를 쏙쏙 빼먹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신 분들과도 얘기가 통한다. 그리고 이런 추억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은 역시나 6년 동안 열심히 걸어 다녔던 용선골이었다.


존 밴빌의『바다』에서는 병든 아내를 잃고 50년 만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쓸쓸한 한 남자가 나온다. 훌쩍 자란 딸이 있지만 온전히 혼자여야 하고 혼자인 것 같은 남자. 내면에 슬픔이 가득하지만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 아내가 없는 낯선 감정을 처리할 수가 없는 맥스라는 남자다. 그래서 아픈 추억이 깃든 바닷가에서 그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72~73쪽)’ 라고 말한다. 마치 종류는 다르지만 이 슬픔이 자신만의 슬픔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는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206쪽)’ 고 했다. 11년 전에 처음 읽고, 작년에 재독했던 이 문장의 의미를 용선골을 보며 비로소 이해했다. 25년 동안 나는 그 길을 완전히 떠나 있었지만 내 기억은 그 길 곳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겨우 그 길을 더듬었다 직접 마주하자 그제야 흩어져 있던 기억과 장소가 일치한 기분이 들었다. 미미하긴 하지만 내 기억도 움직임을 싫어하고 있었고, 비교적 크게 변한 게 없는 용선골의 길들은 정지된 상태에서 기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맥스는 모든 게 변해 버린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바닷가에서 천천히 그 여름을 떠올린다. 떠올리지 않아도 스스럼없이 드러나는 기억의 파편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것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고통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기억 중의 하나를,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게 내겐 용기로 보였다. 그 당시 자신의 이상을 편입하려 했던 그레이스 가족. 그 가족과 함께 하고 클로이에게 느꼈던 연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클로이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와 함께 여전히 클로이는 자신에게 어린 소녀였고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거기서 멈춰버린 듯했다. 


‘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151쪽)’며 그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한 때를 보낸 바닷가에서 아픈 과거를 들추었지만 맥스가 살아야 할 시간에는 현재와 미래도 있었다. 아내와의 추억과 그녀가 남겨준 것들과 딸과의 새로운 관계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맥스는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로 인해 깊은 슬픔을 맛보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새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맥스가 아픈 기억이 있는 바다를, 아내를 잃은 뒤 혼자가 되어 다시 찾은 이유가 오로지 과거의 기억 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62쪽)’ 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그 아픈 기억을 다시 들춰내는 걸 보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으려구나 지레짐작 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진작 가볼 수 있었던 용선골을 25년 만에 가본 것도 내겐 큰 용기였다. 세월은 지났지만 오래전 그 길을 걸었던 내가 있었고,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라고 해도 내겐 큰 의미가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로 나를 밀어내며 살아가고 있다 여겨 늘 불안했던 나는 그 길에서 존재했던, 그리고 현재의 나와 연결된 또 다른 ‘나’를 만났다. 고작 어렸을 때 걸었던 그 길 하나로 뭐가 이리 거창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게 빨리 변하고 쉽게 잊히고 새로운 것만 찾게 되는 요즘에 그 길은 내 존재의 의미를 새삼 밀어 올려주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진짜 과거는 우리가 그런 척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148쪽)’는 말처럼, 맥스가 오랜 세월 후 마주하게 된 V양이 “그래서 지금도 여기 있는 거예요.”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뒤까지.” 라고 고백하고 그녀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마음 한구석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잊힐 것 같던 오랜 기억에 대한 애잔함이 올라왔다.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미화된다는 것을 안다. 다행히 용선골은 비교적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거기 있었지만 좋은 추억만 있는 게 아니다. 함께 그 길을 둘러보던 딸아이에게 어렸을 때 엄마가 이 길을 혼자 걸어 다녔다고 말하자 아이는 바로 물었다.


“엄마, 무서웠어?”

“응. 많이.”

“그래서 울었어?”

“응. 울면서 집에 갔어.”

“많이 힘들었겠네.”


그렇지만 여전히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날은 학급 도서에서 빌려온『충효사상대전집』을 읽으며 걸었다. 학구열이 뛰어났던 게 아니라 그 길이 너무 무료해 내 나름대로의 처방전이었다. 그 뒤로 공부 쪽은 영 소질이 없었지만 여전히 나는 책을 좋아한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시점이 언제인지 더듬어 보면 정확한 기억이 없어, 용선골을 걸으며 읽었던 『충효사상대전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야 그 경험과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왜 이 낯선 곳에 우뚝 서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정체성 혼란이 올 때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재소환해준 게 지난 주말 다시 돌아본 용선골이었고, 당분간은 이 기억으로 버틸 힘을 얻은 것 같다. 누군가 그랬던가. 행복한 기억 하나만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 진부하게 느껴졌던 말이 왜 이렇게 뭉클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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