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원고 - 논픽션 대가 존 맥피, 글쓰기의 과정에 대하여
존 맥피 지음, 유나영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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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피의 글에서 구조는 단어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일반적인 작가라면 직접 서술할 내용을, 맥피는 장과 장 사이에 여백을 두거나 문장과 문장을 독특하게 병치해서 표현한다. 마치 모스 부호 같다. 공백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된다. 13쪽


서문을 읽으면서 글의 구조, 구조, 구조에 대해 역설해서 본격적으로 읽기 전부터 기가 빨려버렸다. 이러다가는 글의 구조를 생각하다 읽기 자체를 놓칠 것 같다 불안했다. 이런 독자의 걱정도 계획한 걸까? 막상 저자의 ‘강박적 집필의 과정’을 읽기 시작하자 글의 구조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다만 저자의 글은 술술 읽히지만 저자는 결코 쉽게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글 자체에 대한 의문들이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자가 1975년부터 프린스턴에서 가르쳐온 글쓰기 강의록이라고 한다. 강의 중에는 집필을 하지 않는 저자가 얼마나 철저하게 두 과정을 이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독자가 이런 반응을 갖길 원하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강의록의 느낌을 남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내 글은 그저 쓰잘머리 없어 보인다. 굳이 쓰지 말아야 할 글을 남기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전문적으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므로 내 글의 구조 같은 건 내버려두고 평범한 독자의 시선을 나눠보려 한다.

독자들이 구조를 눈치채게끔 해선 안 된다. 구조는 사람의 외양을 보고 그의 골격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만 눈에 보여야 한다. (…) 구조에 글감을 억지로 끼워맞추면 안 된다는 얘기다. 82쪽

모든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모으기, 검토하기, 분류하기, 집필하기 과정을 거치는데 저자는 거의 초인적인 수준으로 극단까지 밀어붙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역설하는 글의 구조를 나는 절대 따라할 수 없을지언정 공감 가는 부분은 많았다. 예를 들어 강 여행을 하다가 회색 곰을 조우하는 순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현재, 과거, 시간에 맞추는 것을 보며 분명한 차이를 보았다. 또한 글 자체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들과 발행인, 인터뷰를 끌어내는 법, 참조 틀, 체크포인트 등 글이 완성되는 과정에 있는 다양한 시선과 형식으로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엘리너 굴드라는 22세의 배서칼리지 졸업생에 대한 소문이 특히 그랬다. 1925년에 갓 창간된『뉴요커』를 사서 읽고는 파란 연필로 교정해가며 다시 읽었고, 교정을 끝냈을 때는 잡지의 모든 페이지가 얼룩덜룩한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정한 잡지를 초대 편집장인 해럴드 로스에게 우편으로 부쳤고, 이것을 받아본 로스는 “이 새끼 당장 찾아서 채용해!” 라며 고함쳤다고 한다. 이후 굴드가 하는 일을 뭉뚱그려 ‘교열’이라 했으며 문법 전문가라는 직함을 수십 년간 받아들였지만 굴드는 모니터하며 다루는 많은 부분의 기초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흥분된다. 대리만족을 넘어, 이상적인 꿈에 도달한 기분이 든다. 정말 저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이야기를 들으면 글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글쓰기는 선별이다. 글을 시작만 하려 해도 언어에 존재하는 100만여 개의 단어 중에 한 단어, 딱 한 단어를 택해야 한다. (…)무슨 글을 쓸지에 대해 절대 시장 조사를 하지 마라. 가는 길에 도사린 온갖 중단, 재출발, 망설임, 기타 장애물을 뚫고 나갈 수 있을 만큼 흥미를 가진 주제에 대해 써라. 291쪽

글쓰기 강의록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도움을 받을 거란 희망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좋은 책을 만나면 늘 갖는, 글 쓰는 건 다른 이에게 맡기고 난 열심히 읽자는 생각이 역시나 이번에도 들었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겠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저자가 어떠한 의도였던 간에 헤밍웨이의 생략 이론처럼 ‘창조는 독자의 몫’으로 이미 나에겐 색다른 결로 와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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