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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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더 많은 사람의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멀리 더 넓은 안목으로 그런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이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인간에 목적은 둔 가치관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32~33쪽

 

소설에 편중되어 있던 나의 독서가 요즘에는 인문학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마주했던 인간군상에 대한 궁금증이 이제야 드러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시간은 좀 걸리긴 했지만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문학과 기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기독교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지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사유 속에서 먼저는 그런 의미를 찾았다. ‘인문학적 사고를 함으로써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고정된 목적의식을 가진 학문과 차별화’ 되기 위함이라고 말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인문학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대화를 통해 나와 너의 주장을 양보하고 모두를 위해 더 좋은 제3의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가치추구의 정도임을 알려주는 것이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48쪽

 

또한 저자는 선진사회의 지성인들은 사회과학적 사고와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자연과학적 방법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많은 갈등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근대사에 늦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철학을 가르쳤던 저자는 기독교인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와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표와 삶의 방향을 굉장히 깊이 있게 연관시켜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부터,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사회과학을 독점했던 이유, 종교가 휴머니티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 그 안에서 여전히 종교의 잘못이 드러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건전한 종교와 참다운 신앙은 언제나 좋은 인간성 위에 건설되는 법이다. 113쪽

 

인문학과 기독교, 그리고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적확한 시선이 아닌가 싶다. ‘좋은 인간성’이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휴머니티도 복음도 사랑을 전할 수 없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린다면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우리를 지배할 뿐이다.’”라는 말처럼 존재의 유무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엉뚱한 것이 지배하고 만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는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답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기독교는 그것을 구원의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이라고 말이다. ‘겸손히 무릎 꿇고 엎드려 기도를 드리는 나로부터 출발하며, 그 결실을 가져오는 진리가 참된 진리인 것’이며, ‘영원한 진리란 언제나 새로운 진리이며, 그것은 항상 나를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진리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종교는 주체자의 근원과 목적에 관여하는 문제이며, 신 앞에서 스스로의 완성을 결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최후의 주체성을 지니게 된다. 189쪽

 

기독교가 주체성을 지니면서도 절대 진리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유가 설명되는 듯하다. 하지만 ‘영원한 진리’는 언제나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고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올바르게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진리가 솟아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교회는 개인적인 진리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시선을 돌리라고 말한다. 오늘날 이 사회가 ‘사랑과 자비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모두 잊어버’린데에는 게으른 기독교의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그렇기에 모든 것의 근본인 사랑에 도달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말씀처럼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 삶을 본받는 것이며, 윤리나 도덕 이상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문학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수많은 개념과 사상이 생겨나고 보완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의 깊이에 때론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인문학이 휴머니티로 변화되는 과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사랑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엔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촘촘하게 인문학과 기독교를 엮어 개념을 확장시켜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오늘도 깨닫는다. 다른 사람을 욕하는 일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모두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의 나는 과연 얼마나 폭력에 자유로웠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움만 남는다. 이 폭력들을 회개하지 않으면, 사랑을 하고 사랑을 전해줄 수 없게 된다. 당장 내 사랑을 먼저 해결하는 일이 게으른 기독교인에서 벗어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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