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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도치의 회고록
알랭 마방쿠 지음, 이세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가시도치 느굼바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친애하는 바오바브나무를 부르며 이야기를 하지만 바오바브나무는 늘 대답이 없는 것처럼, 느굼바의 눈높이에서가 아닌 높은 가지 위에서 듣고 있는 기분이다.
느굼바의 그 수다스러움에도 왜 나는 느굼바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 쉴틈 없이 이어지는 느굼바의 이야기가 단순한 가시도치의 인생이 아니였기 때문일 것이다.
느굼바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쯤, 동물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세상이 펼쳐질 거라 착각하고 있었기에, 그 뒤로 펼쳐진 느굼바의 행동이라든지 고백은 충격적이였다. 느굼바는 단순한 가시도치가 아니였다.
그는 인간의 분신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고 인간에게 복수를 대신하는 킬러같은 존재였다.
가시도치가 어떻게 킬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겠지만 느굼바는 자신의 가시를 이용해서 살인을 했다.
그 흔적은 교묘해서 사람들은 가시도치가 그랬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내가 키방디와 느굼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죽는 순간에만 느굼바의 존재를 조금 느낄 뿐이였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느굼바와 키방디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느굼바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분신이거나 키방디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못한채 키방디는 죽고 느굼바는 떠나야 할 운명에 처해있다.
키방디가 죽음을 맞이 했음에도 자신은 살아 있었기에 그는 수 많은 얘기를 쏟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면서도 자신감은 잃지 않은채 떠난다.
그렇게 떠나왔지만 느굼바가 앞으로 계속 살인을 하게 될지 또는 자신이 살던 밀림으로 돌아갈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명령대로 살아가야 하는 그 운명은 얼마나 씁쓸한가.
그 씁쓸함의 허무가 바오바브나무에게 고백하는 회고록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 그 삶 또한 순탄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살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인간의 분신이였고 인간이 명령은 자신의 숙명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세계의 킬러처럼 그는 냉철함을 유지해야 했고 한치의 오차도 내어서는 안되었다.
그런 삶을 수십년 살다 보니 인간세계와 그가 저지른 살인이 이젠 성찰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실로 그가 내뱉는 고백들 중에서는 인간과 인간세계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고뇌까지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그런 느굼바와 만나는 시간은 흡인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저자의 문체를 환상문학의 작가들과 비교했던 이유를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것처럼, 그의 언어는 능구렁이 처럼 술술 넘어가지만 녹록치 않았다.
그래서 느굼바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푸념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푸념의 원인을 느굼바의 눈높이에서 진정을 다해 그의 말을 들어주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저자의 문체속에 모호함으로 넘겨버리는 모든것은 혼란스러웠다.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느낌, 그 느낌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지속되었기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과 다 읽었다는 명확성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있었고 흐름도 있었지만 경계선은 뚜렷이 보지 못한 느낌, 안개를 뚫고 나와서 바오바브 나무에게 실컷 중얼거리다가 다시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 그런 모호함 속에서 느굼바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게 느굼바는 저자가 만들어낸 한 편의 풍경 속으로 흡수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풍경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느굼바가 뱉어낸 자신의 이야기와 살인과 인간세상에 대한 비난은 끈덕지게 남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 여운은 오래 남아 느굼바의 독설을 생각하게 할 것이지만 언어의 모호함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그건 느굼바의 중얼거림이였기에, 기꺼이 건져내 올려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단순한 반성이 아닌, 느굼바처럼 인간세상에 대한 성찰이 되었을 때, 느굼바의 진리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