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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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맞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23쪽


 

‘묵시와 예언, 상징으로 가득하고 이 책을 근거로 많은 이단이 나온 것도 사실이기에 선뜻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는 저자의 고백에 나 역시 공감한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글자만 읽고 넘어간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종말이 아닌 주 예수님이란 말에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오해가 풀리고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면서 미지근하여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하신 말씀이 직구로 쿵, 하고 날아왔다.

 

예수님을 믿어도 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113쪽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교회에 안 나오는 것보다 나오는 게 낫지 않냐, 중언부언 기도라도 하는 게 낫지 않냐고 적반하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행동이 정말 주님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나씩 내 상태를 알아 갈수록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를 철저히 깨달아간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수님을 믿으려면 고난을 견디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욕먹고, 핍박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불의에 참고, 바보처럼 당하라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상황, 심지어 생각까지 주님께 의미를 물어보라는 뜻이다.

 

기도 없이 사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연하고 답답한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177쪽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요즘의 나는 기도시간에도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 내 마음이 마땅치 않아 스스로 고립되고 아무런 의욕도, 간구도 하지 않는 나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책망하셨던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의 믿음처럼 뜨뜻미지근하니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인데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혼자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힘들다고 징징대는 모습을 보인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자신의 한계를 깨트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구하지 못하니 중보 기도가 나올 리가 없다. 내 개인적인 이익과 고민과 걱정에서 빠져나올 리가 없다. “창조주 앞에서 ‘이것을 보십시오, 제 집을 보십시오, 제 차를 보십시오. 제 몸을 보십시오. 제가 모은 이 조개껍질들을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라는 존 파이어 목사님의 말씀처럼,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다.

마귀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하늘에서의 전쟁에서 이미 패하여 땅으로 쫓겨난 존재입니다. (…) 그런데 마귀가 가장 증오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대상이 교회입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더 그렇게 할 것입니다. 224쪽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입는 상처, 시련, 고통들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알면 지혜롭게 헤쳐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안에는 자유의지가 분명하게 있다. 그 자유의지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냐의 차이일 뿐, 나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면 된다. 요한계시록의 의미를 깨닫는 시작은 단순한 이 진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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