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호수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정용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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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고 싶었어. 누군가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그 생생한 느낌을. 그 시절 남편은 나를 원했어. 나는 그를 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그가 나를 원하는 것처럼 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땐 그게 필요했어. 120쪽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텐데…….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의 초청으로 간 주인공 윤기는 7년 만에 스위스 장크트갈렌에서 만난 옛 연인 무주를 만나서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7년 만에 옛 연인을 만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온갖 상념들을 끌어내는 일은 더 흔치 않을 것이다. 거기다 어긋났던 시간과 그때의 상황들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듯이 헤어질 때의 어긋남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윤기와 무주를 보면서 느꼈고, 그들이 7년 전을 다시 떠올리며 되짚는 대화들로 이미 충분했다.

여행지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용기는 항상 옳아요. 하지만 그 용기는 한 번만 내세요. 그곳에선 뭔가를 결정하면 안 돼요. 그건 용기가 아니에요. 어리석은 거지. 42쪽


윤기를 일정을 조율하고 안내했던 가이드 민영은 그가 장크트갈렌에 간다고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적어도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건 옳다고 말했던 그녀가 ‘한 번’이면 족하다고 말했을 때는 뭔가 경험이 묻어났다. 마치 윤기의 결정이 불안하다는 듯이 혹은 그런 결정 뒤에는 후회만 남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나중엔 오히려 윤기의 그런 결정 때문에 자신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말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마음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릎에 놓인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주의 책이었고 나중엔 내 책이었다가 어느 날부터 우리의 책이 되어 우리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무주에게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01쪽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을 7년 전에 헤어진,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키우고 있는 옛 연인의 집에서 만나는 기분은 어떨까? 설렘과는 동떨어진,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확인 정도라고 해야 할까? 윤기와 무주가 마주하고 있는 시간들이 분명 이상하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지만 편하게 마주하며 헤어질 때의 이야기, 그때의 습관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모습에서 느꼈다. '다시’가 아닌 그저 각자의 기억 속에 와해되었던 시간을 되짚어 보는 것이라고, 모습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오랫동안의 응어리를 푸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남편을 따라 장크트갈렌에 간 무주의 기억이 남아 있었고, 일 때문에 빈에 갔을 때 와해되었던 기억과 응어리를 덜어내고 싶다는 바람이 무의식중에 윤기에게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훨씬 가까워진 거리에 용기를 냈을 것이고, 용기의 방향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지만 어찌 되었건 후회와 미련, 오해, 불안함 등등 무주를 향한 여러 감정이 많이 해소되었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니까 헤어진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작은 책상에 앉아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갖는 일이다. _작가 노트

윤기와 무주는 혼자만 펼칠 수 있는 책을 잠시나마 함께 펼친 셈이다. 그게 다행인지, 후회가 남을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결혼한 지 7년이 넘은 나에게도 그렇게 함께 책을 펼쳐보고 싶은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전혀 허무하지 않았다. 과거는 이미 충분히 곱씹을 대로 곱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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