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비꾼 새는 귀엽지. 하지만 돈이 아주 많이 들어. 이런 새를 키우는 게 남자에게 얼마나 돈이 드는 일인지. 16쪽


노라의 남편이자 곧 은행총재가 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될 헬메르는 이런 말을 서슴지 않는다. 1897년에 발표된 소설이기에 당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더라도 여성이 또 다른 존재가 아닌 ‘돈이 아주 많이’ 드는 ‘낭비꾼 새’로 묘사되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노라는 순간 불쾌해 하긴 해도 남편의 그런 표현과 그렇게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락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앞으로 늘어날 남편의 수입에 대한 기대로 차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린데 부인이 로라를 방문하면서 로라에게 서서히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그 대상이 사라지자 공허함을 느낀 린데 부인과 달리 인형처럼 살고 있는 로라의 삶이 대비된다. 로라는 남편이 크게 아팠을 때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돈을 빌린 사실을 린데 부인에게 털어 놓는다. 당시는 이유를 떠나 남편 몰래 돈을 빌린다는 사실은 남편의 명예 훼손은 물론 치욕으로 느꼈기에 로라가 철저하게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로라는 아버지가 치료비를 내 주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차용증서 사인을 도용해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덕분에 남편은 회복될 수 있었고 현재의 안락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신은 나의 행복을 모두 부서뜨렸어. (…) 나는 이제 이렇게 무너져서, 경박한 여자 때문에 망해야 해! 151쪽

돈을 빌렸던 크로그스타드가 직업을 빌미로 로라를 협박해 오고 마침내 비밀이 모두 드러났을 때 헬메르는 로라에게 비난의 말을 쏟아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있으니 모든 걸 감춘 채 로라에게는 집에 있되 아이들의 양육을 맡길 수 없다고 말한다. 로라는 남편 몰래 돈을 빌려 건강을 회복시키고, 그 돈을 갚기 위해 남편이 준 돈을 아끼고 때로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건 참 즐거웠지. 내가 꼭 남자가 된 것 같았어.’ 라고 말하며 또 다른 기쁨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정당하지 못한 방법일지라도 남편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큰 만족감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때 헬메르가 모든 걸 품어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나 역시 헬메르의 반응이 궁금하긴 했지만 바로 아이들의 양육까지 맡길 수 없다며 존재를 무너뜨리는 발언 앞에서 실망하고 말았다.

나는 나 자신과 바깥일을 모두 깨우치기 위해 온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더 이상 당신 집에 있을 수가 없어요.

163쪽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라며 로라는 집을 나가겠다고 한다. 헬메르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충동적으로 집을 나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까지 두고 아예 다른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자신을 인형 아기로 키웠던 것처럼 헬메르에게 인형 아내로 이어진 모든 것을 철저히 부수고 그녀는 완전히 새로 태어나려고 한다. 아이들을 두고 나가는 것 때문에(정확하게는 로라가 아이들을 키우지 않았다)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나 역시 처음엔 아이를 두고 나갔다는 것 때문에 마음에 걸렸는데 로라 자신도 유모에게 크고 자신을 키웠던 유모의 손에 로라의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며 걱정을 떨쳤다. 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나는 나 자신부터 교육해야’ 한다며 헬메르의 말에 완전한 깨달음을 보인다. 더 이상 인형의 집 속에 사는 꼭두각시 같은 로라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로라가 되기로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다.

집과 남편과 가정을 버리다니!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는 생각도 안 하다니! 163쪽

헬메르의 비난처럼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자식 때문에, 타인의 시선 때문에 내 자신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로라를 보며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을 찾으라며 선동하는 게 아니다. 지금껏 ‘나’라는 존재를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이 이제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위해 첫 발을 내디딘 것임을, 스스로의 선택을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