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클럽
크리스티앙 가이이 지음, 김도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자리 하고 있는 실패와 아픔이 있을 것이다.

그런 실패와 아픔을 내 자신이 감춘다고 하여도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삶 가운데서 온전히 피할수도 완치도 바라기 힘들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게 될 때의 상처, 그것과 마주하게 되었을때의 열등의식. 그것을 뛰어 넘기란 힘이 든다.

시몽에겐 재즈가 그랬다. 10년동안이나 재즈 피아노를 연주했음에도 재즈와 떨어진 삶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팍팍했을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그 고통을 이겨낸 듯 살아가지만 운명적인 만남 앞에서 억눌렀던 그 간의 감정은 터져 버리고 만다.

적적히 피한다고 재즈를 잊을 수 있을까.

또한 자신의 진실된 바램을 끝까지 숨길 수가 있었을까.

운명적이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의 흘러감은 그렇게 시몽을 다시 숨쉬게 해주었다.

 

자신이 타지 않은 기차 때문에 아내 쉬잔은 목숨을 잃지만 그녀의 죽음은 하나의 고요와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을 알린 셈이였다. 시몽에겐 새로운 삶과 재즈로의 복귀,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우연히 찾아간 재즈클에서 그는 운명적으로 그 모든것을 한꺼번에 만나버렸기에 쉬잔의 죽음은 충격적이지만 그를 위해선 묘한 시기 적절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사랑 데비와의 시간속에서 아내 쉬잔을 기다리지만 그는 쉬잔에게 돌아갈 마음이 없다. 더불어 재즈를 떠날 마음도.

그러나 그를 데리러 오는 쉬잔은 어떠한가.

그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함에 너무 쎄게 달렸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때 숲 사이로 드러난 하늘을 보았을까.

시몽이 아닌 자신의 삶을 위해 그녀가 죽어 갔고 그 고요를 만들어 갔기를 바랄 뿐이다.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움으로 그의 시작을 행복으로 느낄 수 없음에는 묘한 타이밍이 있었다. 시몽이 데비와 함께 재즈를 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을때 쉬잔은 시몽을 데리러 오다가 목숨을 잃었다.

시몽이 재즈를 포기한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온 삶의 시작에서 쉬잔의 도움이 컸지만 그녀 또한 진부한 삶의 요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으로 갈라져 버린 그들의 삶의 양상은 차분했는지도 모른다.

 

시기 적절함을 비난할수도 안타까워 할수도 없을때 재즈는 특유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담배연기 그득한 몽롱함과 늘어지는 선율의 나른함.

시몽은 자신을 파괴하고 다시 자신을 살린 재즈를 빌어 하나의 곡을 완주해 가듯 자신을 얘기하고 있었다.

시몽이 재즈클럽에서 재즈를 듣고 재즈를 연주할때 그러한 재즈의 매력이 품어져 나오는 것보다 재즈를 모르는 내가 재즈를 읽었다고 할수 있을 요소는 문체였다.

마일즈 데이비즈와 빌 에반스를 약간 들은 내가 재즈를 이해하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진국이 우러나오고 느낌이 다르다는 걸 조금씩 느껴갔기에 문체에서 재즈를 듣는 것이 아닌 재즈를 읽었다고 과감한 표현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내 귀에 감기다가도 한발짝 물러서며 정신을 놓치게 하다가 아득함으로 몰고가는 치고 빠짐이 몽롱함으로 이끌 듯 저자의 문체는 그랬다. 때론 몽롱하게 때론 열정적으로 때론 우울하게 치닿는 그의 글은 재즈를 단순히 흉내냄이 아닌 완성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글의 끝은 또다른 굴곡을 연주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의존하는 분위기가 났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어느선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재즈가 재즈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듯이.

 

재즈를 모르는 내가 재즈를 운운하는 것처럼 우스운게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짧은 식견이나마 책의 문체를 비유하고 싶었을 그 흥분은 전해주고 싶었다.

저자의 자전적일만한 재즈에 대한 시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저자는 자신의 실패와 아픔을 뛰어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하고 싶고 드러내기 싫은 그의 삶에서의 재즈를 그는 과감하고 그리고 매력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한단계 자신을 향해 발돋움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돋움은 재즈를 뛰어 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자유를 만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정쩡하게 시작하고 끝낸 드럼과 태권도를 언제 뛰어 넘을 수 있을까. 그것을 딛고 한계를 넘어 언제 나는 내 자신에게 자유를 던져줄 수 있을까.

 

Miles Davis의 'Kind of Blue' 를 슬그머니 오디오에 걸어본다.

저자의 자유를 나눠 가질 수 있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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