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31쪽


 

1995년~1996년 사이에『주간 아사히』에 실린 저자의 에세이를 읽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물론 저자와 나는 나이차이가 있어서 공통된 주제와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마치 시간여행을 한 듯 나에게 주어졌던 1995년~1996년의 기억들이 조금씩 올라왔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받은 느낌이었듯, 잊고 있었던 과거를 되짚어본 기분이랄까? 저자의 에세이는 모조리 읽었다고 여겼는데 숨겨진 이야기를 불쑥 발견한 느낌이었다. 반면 당시 중학교 2학년~3학년이었던 나의 모습과 추억들은 형체보다 기억뿐임에도(학교, 짝사랑, 고민, 번뇌, 진로, 독서 등) 사라져 없어졌다 다시 건져 올린 것 같았다.

 

물론 나이들어서도 상처받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그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두고두고 곱씹는 건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25쪽

 

저자는 상처 받았던 일을 떠올리면서 상처 받지 않기 훈련을 통해서 많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지만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쉽다는 건 젊은이에게 흔히 보이는 경향인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가 아닐까’란 말을 했다. 최근에도 상처받은 일이 있었던 나는 이 문장 앞에서 멈칫했다. 나는 현재 어느 단계일까? 나이의 의미가 상대적이긴 하지만 나이는 먹었으면서 젊은이들의 고유한 권리를 너그럽지 못한 마음으로 풀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두고두고 곱씹는’ 단계에 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면서도 결국은 그런 단계까지 가고 마는 연유를 생각하자 괜히 복잡해져 버렸다.

 

이렇게 마이너한 관심사에 취향이 통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꽤 유쾌해진다. 인생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가운데 하나다. 198쪽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소확행’이 저자가 가장 먼저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자의 웬만한 에세이를 읽었다고 여겼던 나는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마치 잊고 있던 저자의 이야기를 만난 것 같은 이 책에서 ‘소확행’ 단어를 만났다. 저자의 에세이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꼭 이렇게 대놓고 정의하지 않아도 저자의 일상에서 심심찮게 ‘소확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소확행’ 확장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어떤 틀에 맞추는 건 아니다(저자도 마찬가지일거라 여긴다). 저자가 궁금한 걸 해소시켜가고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잘못된 것에 용서를 구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소신대로 생각을 굽히지 않는 모습에서 적어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지로 이야기한다는 느낌은 없었다는 뜻이다. 저자 또한 동시에 작업한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인『언더그라운드』가 상당히 무거워서 이 글들을 연재하면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밝히다『언더그라운드』를 읽고 저자를 완전히 다르게 보고 다른 작품을 탐독했던 터라, 비슷한 시기에 쓰인 이 글들이 하루키란 저자를 좋아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마음의 경계에 다시 걸터앉은 느낌도 들었다.

 

만약『언더그라운드』를 읽기 전에(작품의 비교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내 마음의 인식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에세이를 먼저 읽었더라면 과연 저자의 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별 고민 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일찍 읽어버렸다면 분명 이 글들의 매력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텐데, 약 24년이 지난 후에 읽게 된 느낌은 마치 잊고 있었던 일기장을 찾은 느낌이라고 하면 이상할까? 열정적이면서 풋풋한 면이 없지 않지만 현재의 내 모습(저자에게는 그 이후의 작품들)의 중요하지만 서툴렀던 자양분을 발견한 기분이다. 다시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가 되는 행위. 이 글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내 기억들이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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