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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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고 아쉬운 마음에 저자가 참고했다는 자료와 연구 목록을 쭉 살펴봤다. 거의 다 모르는 책들이어서 실망감이 젖어들 무렵 아는 저자와 책들이 몇 권 보였다.『대소설의 시대』는 국학자들의 뛰어난 연구 성과에 힘입어 창작되었고, 특히 정민, 안대회, 정별설, 이지하, 장시광, 한길연 선생님의 논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정민, 안대회, 정별설 선생님의 강연도 듣고 책도 소장하고 있는 나에게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소설을 다 읽어버린 아쉬움, 다음 이야기이자 의금부 도사인 ‘나’ 이명방이 쓰게 될 소설을 기다리는 동안 반가운 이름의 선생님들이 남긴 책을 읽겠노라 다짐했다.


‘나’ 이명방은 절친이자 규장각 서리 김진에게로부터『산해인연록』의 임두 작가님을 뵙고 오라는 명령 같은 부탁으로 소설은 시작된다.『산해인연록』의 열렬한 팬이면서 임두 작가님을 뵙는 것이 평생소원인 이명방이지만 선뜻 뵙고 오겠단 말을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23년 째 대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임두 작가님을 뵌 사람이 없었고, 집필에 어떠한 방해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떨리면서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어떠한 찬사로도 부족한『산해인연록』의 임두 작가가 지금은 할머니가 된 여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불같은 성격 앞에 당황한다.

모름지기 소설은 한가한 나날의 심심풀이지만, 뜻밖에도 슬픔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까. 1권 82쪽

대작가 임두의 정체에 놀란 것도 잠시 이명방은『산해인연록』이 사도세자가 죽은 뒤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직접 대소설을 짓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23년 간 쓰인 소설이 5개월 째 머물러 있고, 소설에 황족이 등장하면 꼭 요절하지 않도록 약속 했는데 소설 속 인물 창화 공주가 병상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 궁중에서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연유를 알아오라는 게 이명방과 김진의 일이었다. 단순히 임두 작가가 큰 이유 없이 다음 이야기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소설을 구상할 때 결말까지 써둔 ‘휴탑’ 수첩을 둔 장소를 잊어버리고, 치매를 않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런 임두 작가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문하의 두 제자 수문과 경문이 그 뒤의 이야기를 이을 처지에 처한다. 마마의 명령이니 도망갈 수도 없고, 임두 작가의 문하에서 오랜 세월을 연마했으니 부족하지만 마무리 짓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혹자는 처음부터 내가 백 권이 넘는 대소설을 쉽게 써 내려간 줄 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시가 천재들의 예술이라면 소설은 둔재들의 예술이다. 2권 91쪽

김진과 이명방은 ‘휴탑’ 수첩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수첩 전에 임두 작가를 찾는 일과 수문과 경문이『산해인연록』을 이어쓸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하는 일까지 맡아야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진은 혼자서 탐문을 하면서 이명방이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려준다. 또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임두 작가의 손녀 임승혜에게 할머니에 관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다. 왜 23년 간 대소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왔는지,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알면 알수록『산해인연록』이 범접할 수 없는 소설이라는 것, 대작가 임두가 평생을 받쳐 쓴 소설임을 더욱 더 깨달아 갈 뿐이다.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그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만 봐도 소설의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더 작가의 행방과 소설의 완결을 염려하는 게 비로소 이해가 갔다.

어머님은 형편없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소설 쓰는 기쁨까지 앗아서는 안 된다고, 소설로 인해 상처 주거나 상처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2권 89쪽

기쁨으로 쓰는 소설은 독자에게도 그 기쁨이 전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임두 작가나 그의 제자들이 이 기쁨을 온전히 누렸는지는 모르겠다. 분명 그런 순간을 느낀 적이 있을 테지만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 없다. 임두 작가가 칩거하고 있을 곳에서의 폭발과 시신 발견, 소설의 완성, 그리고 범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들이 흥미로우면서도 잔인했고 추악했기에 소설 쓰는 기쁨과 상처 받는 일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었다.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 정신없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무조건적인 해피엔딩을 바라진 않았지만 순리대로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럴수록『산해인연록』의 의미가 나의 생각보다 더 넓고 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의 말미에 임승혜가 김진과 이명방에게 준 선물의 의미와 이명방에게 남겨진 숙제가 그 세계를 더 경험하게 해 줄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궁중의 여인들이 임두 작가에게 앞으로도 300권이든 400권이든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쓰라는 잔인하면서도 칭찬의 의미가 담긴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백탑파 시리즈를 띄엄띄엄 읽어서 다시 주인공들을 만나고 싶었다. 저자는 백탑파 시리즈 준비과정부터 열권의 책이 채워지기까지 19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탐정은 여전히 20대 청춘인데 작가만 늙었다’며 한탄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계속 읽고 싶다. 내가 나이 들어가는 순간까지, 모두가『산해인연록』에 바랐던 그 마음처럼,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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