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운명이라고 여겼던 만남과 일들이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불거져 나온 불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펼쳐진 초원, 푸른하늘, 나를 감싸는 바람의 한가운데 서 있을때면 운명을 꿈꾸어 본다. 이 평안함을 전해줄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나처럼 똑같이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겠지 라고.

그러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이러한 생각들을 꺼내보며 잠시 멍해진다.

지금 내 손에는 리셋이 쥐어져 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이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어 준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2005년 봄. 화창한 일요일 오후 심부름을 가기 위해 교회 아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부터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걸 알았으니 시골길의 달림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상쾌한 바람을 쐬며 달리다보니 내 눈앞에 보리밭이 나타났다.

바람이 보리밭을 일렁이게 만드는 광경을 보며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수확하기 전의 노란 보리였으니 바람이 스칠때마다 사삭거리는 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 하다.

그 보리밭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 매년 그곳을 다시 찾았지만 그 감동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라카미에게는 나보다 더한 감동이 보리밭에서 일어난다.

바로 마짱을 만난 것이다.

 

무라카미에게 나타나는 슈이치와 마치코에게 나타난 마스미를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환생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슈이치와 마스미가 들어 있지만 무라키미와 마치코의 모습도 존재하기에 그들을 무어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슈이치와 마스미의 결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동성으로 태어났거나 결혼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마음은 더 애틋하다. 시간의 흐름의 차이가 나서 각자 한 삶을 마치고 비로소 만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어긋나 버린 인연이고 쉽게 지나칠 수 있었을 만남이였지만 마즈미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슈이치와의 몇 안되는 추억과 죽음은 슈이치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며 살아가게 한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안되는 추억이기에 그와 함께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마음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상태에서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마즈미는 슈치이를 만난 것이다. 슈이치가 목숨을 잃었을 즘의 중학생인 무라카미를.

서른이 넘어버린 미즈미 앞에 나타난 중학생의 슈이치를 마즈미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마즈미의 보습을 담고 있는 마치코의 등장도 슈치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중학생의 모습에 세일러복 차림이였다.

서로의 마지막 모습으로 만남을 시작하며 동시에 이별하게 되는 사실은 운명의 장난 같았지만 몇십년도 기다렸다는 마치코의 말처럼 그들의 재회가 중요한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사자자리 유성군을 보며 33년 더 살아서 또 보자는 마지막 그들의 대화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삶까지 뛰어 넘는 거스를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였다.

 

이 사랑의 모습을 흩뿌리듯 조급하게 이야기를 끌어 갔더라면 분명 식상했을 것이다. 얼핏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줄거리를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 차분해서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나갔다. 1부에서 슈이치와 마즈미가 함께 존재했던 혼란스러운 전쟁시기에 하루 하루의 모습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했고 성장과 동시에 내면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어 문학적인 면모까지 엿볼 수 있었다.

무라카미와 마즈미의 만남이 슈이치와 마즈미의 만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1부와는 완전히 다른 2부의 내용은 다른 이야기인가 하는 혼란스러움이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1부에 대한 조급함을 눌러 주어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작가의 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이지만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일관된 분위기를 이끌어 낸 책의 분위기는 충동적인 사색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였고 무한한 환상을 자아내는 것도 아닌 여운을 깊게 주어 인상 깊었다.

가볍고 자극적인 일본 소설을 주로 읽다 보니 일본 소설에 대한 식상함이 밀려와 별 기대없이 읽은 리셋은 일본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 지기를 갈망한다.

한 생을 뛰어 넘은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처럼 기다림이 길다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책을 읽는 즐거움도 삶을 살아가는 기쁨도 흔치않는 만남을 기다리며 설레임으로 마주하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