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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모자 ㅣ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로트라우트 수잔네 베르너 지음 / 보림 / 2017년 8월
평점 :
종종 이렇게 글씨가 하나도 없는 그림책을 만나면 즐거워진다. 그림책을 봐도 글씨에 치중에 읽는 나에게 오로지 그림만 보게 만드는 것도 좋고, 내 맘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읽는 것도 좋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설렘 가득한 마음을 안고 책을 펼쳤다. 제목에서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자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모두 모자를 쓰고 있지만 모자가 날리는 주인공은 바람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듯 이제 막 날아가기 시작한 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날아가는 모자를 따라가 보지만 허사다. 그때부터 모자의 여행 아닌 여행이 시작된다. 겨울에 날아간 모자는 이제 막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봄에 거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비오는 날 강아지의 입에 물려 있기도 하고, 강아지의 주인은 모자를 쓰고 동물원에 갔지만 원숭이에게 뺏기기도 한다. 원숭이가 모자를 쓰고 있을 때 동물원 담 너머로 처음에 등장했던, 바람에 날리는 모자와 크기만 다른 모자를 쓴 책을 읽은 신사가 등장한다. 무언가 이 신사와 모자가 인연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던 사육사가 그 모자를 쓰고 비오는 날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짐칸에 모자를 올려놓은 사육사 뒤로 책을 읽는 신사가 보이고 신사도 짐칸에 모자를 올려놓았다. 기차에서 모자를 두고 내린 신사는 여전히 책을 읽으며 걷고 있지만 모자의 크기가 다르다. 책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신사는 모자를 내려놓다 염소에게 씌워 준 것도 모르고, 염소는 모자를 쓴 채 숲으로 간다. 그렇게 모자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주변의 동물들이 항상 등장하는데 동물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하거나, 모자를 쓴 주인공을 힐끔 쳐다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염소가 쓰고 있던 모자는 어느새 토끼에게 옮겨가 있고, 역시나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두툼한 옷을 입은 소년에게 발견된다. 소년은 눈사람에게 그 모자를 씌워주는데 어느새 모자를 처음 잃어버렸던 시점에서 일 년이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자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바라보고 있다. 드디어 오랜 시간이 지나 모자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일까? 모자의 주인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눈사람에게 씌워주고 모자를 찾아 쓰고는 눈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책의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똑같이 등장하는데 이번엔 좀 다르다. 바람에 모두의 모자가 날리지만 주인공은 모자를 꼭 붙들고 있어서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
모자의 긴긴 여행 뒤에 되찾은 모자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빙긋 웃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괜히 나도 웃음 짓게 된다. 그러면서 며칠 전 즐겨 쓰던 모자를 버렸던 씁쓸한 기억이 떠오른다. 2년 전 구입한 모자를 한 번도 빨지 않아 세탁을 하려고 화장실 선반에 모자를 올려 두었다. 이제 막 기저귀를 떼기 시작한 둘째가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화장지를 조금씩 뜯어서 넣더니 급기야 내 모자도 변기에 넣어버렸다. 도저히 다시 쓸 수가 없어 모자를 버렸다. 그리곤 너무 아쉬워서 똑같은 모자를 주문했다. 이 책처럼 오랜 시간 동안 여행하고 올 모자가 아닌 똑같은 상품의 모자지만 주인공처럼 나도 모자를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상황에서도 다시 모자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