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거리 - 일러스트레이터의 눈에 비친 그곳, 보통 사람들
정인하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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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둘째의 방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일주일 내내 나만의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저녁 설거지도 미뤄둔 채 후다닥 챙겨서 카페로 왔다. 큰 아이도 흔쾌히 카페 다녀오라고 하고(대신 올 때 아이스크림을 사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남편은 설거지를 하다 나가는 나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나가라고 했다. 둘째만 곧 울듯이 엄마 어디가냐고 묻기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2018년을 하루 앞둔 일요일 저녁의 카페는 생각보다 덜 북적거리지만 확실히 가족단위 손님들이 많다. 나 혼자 빠져나온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일주일을 좀 열심히 살아보고자(?) 나름대로의 다짐이니 이 순간을 즐겨보기로 한다.


창가자리는 아니지만 카페의 널찍한 책상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으니 이 책의 저자가 생각난다. 저자도 좋아하는 카페에서 좋아하는 자리에서 창밖의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했는데 즐기는 부분이 다를 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주로 카페에 책을 읽거나 리뷰를 쓰러 오지만 언제나 집중이 잘 되는 건 아니다. 그날의 기분과 카페의 상황에 따라 계획이 틀어질 때도 많고, 그럴 때면 다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간 경우도 허다하다. 혹은 집에서는 자꾸 잠만 자고 텔레비전만 보게 되어서 억지로 카페에 오는 경우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카페는 내 삶의 일부분을 차지하며 부지런히 감성을 키워준다.

내가 선호하는 자리는 카페 가운데 차지한 널찍한 책상이라 창밖의 모습은 거의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어쩌다 창가에 앉게 되면 창밖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꼭 창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횡단보도 앞에서나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저자가 그린 그림 중에서 아저씨들의 하이웨스트 스타일, 노인들의 모습, 자전거 탄 사람들 등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과 모습인데도 제대로 관찰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스케치한 느낌이 드러나면서도 유심히, 날카롭게 관찰하지 않으면 그려낼 수 없는 그림이라는 건 언뜻 봐도 느껴졌다. 그런 그럼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관찰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길을 걷거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관찰을 잘 안하는 편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많거나 뻘쭘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쩔 줄 몰라 하는 성격이라 관찰은커녕 볼일만 보고 훌쩍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나와 반대로 사람을 비롯해 건물과 풍경을 세세히 관찰하는 저자를 보면서 오히려 내가 더 느긋해졌다. 바쁜 일도 없는데 늘 걷기 바빴던 날들에 여유가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언가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알 수 없는 날선 경계심도 무너진 것 같았다. 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왜 저럴까’가 아닌 그럴 수도 있고 재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저 저자의 소소한 일상과 그림들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신기했다.

그럼에도 관계 앞에서 서툰 나를 인정한다. 그리고 서투름 속에서 여유를 갖는 법을 배운다.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경계하고 벽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려 한다.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새로워질 수 있음을, 별거 아닌 일에 내 주변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나에게 가르쳐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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