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할지라도 그럼에도 사랑하심 - 사무엘상 2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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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이 책을 마주하기 싫었다. 제목만 보고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내용인가 보다 짐작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읽기를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 열악함에도(매일 야근 하는 남편, 육아, 집안일 등등) 허투루 읽지 않고 끝까지 정독했다. 이상하게 읽기 싫었던 마음과 달리 나를 계속 잡아끌었고, 수없이 무너졌다, 폭발했다를 반복했다. 너무 깊은 은혜가 되어 한바탕 눈물을 쏟다가도, 독서를 방해하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나를 보면 한심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내가 책을 읽으며 은혜를 받으면 뭐하나 싶었다. 당장 내 눈앞에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감정조절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람 피운 남편, 힘든 시댁, 힘든 상사, 힘든 사람들과 환경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내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그들이 수고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이다. 51쪽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저런 상황인데 저 말씀이 정말 감사하게 들릴까? 계속되는 남편의 야근으로 혼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사실 하나에 뭔가 억울함이 서릴 정도로 속 좁은 나인데, 이런 상황을 복음에 빚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내 몸이 좀 편했으면, 내 걱정과 염려와 분노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좀처럼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내 마음 속에 해결하지 못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랬기에 은혜롭다가도 책에서 눈을 떼어 현실을 마주하면 짜증이 자꾸 솟구쳤다.


꼭 좋은 남편과 살아야만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나를 교훈시키기 위해 이상한 남편과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구원에만 관심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허락하신 내 상황을 두고 자꾸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따지면 안 됩니다. 67~68쪽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감사하다가도 무뚝뚝한 남편을 보면 종종 인간적인 마음으로 날 사랑하는 게 맞나, 나는 현재 행복한가를 고민할 때가 있다. 하지만 늘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남편은 꼭 말을 해야 아냐고 하고 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해도 늘 곁에 있는 사람 취급만 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왜 내가 이렇게 짜증이 나 있는지를 따져보니, 한 달 넘게 야근에 찌들어 있는 남편보다 온전히 육아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래서 엉뚱하게 나를 좀 사랑해 달라고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런 고백을 하는데 펑펑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사랑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무뚝뚝한 남편과 살게 하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에서 자라다보니 사랑보다는 방임에 가까운 성장을 지나왔다. 그래서 깊이 사랑 받았다는 기억이 별로 없어서인지 내 스스로도 굉장히 이기적일 때가 많다. 어린 시절 부족했던 사랑을 나는 남편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남편에게는 그 한 마디가 하기 힘들었다. 조금 특별하게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님과 성도들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고백을 듣고 있으면 당황스러웠다. 외도, 도박, 술, 이혼 등등 모두 감추고 싶은 내면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는다. 그렇게 상처받고 죽을 것 같은 사람들만 찾아오라고 광고를 하셨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들이 찾아와 고백을 하고 점점 커져 만 명이 넘는 교회가 되리라고 목사님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도 ‘암나귀’만 찾아 헤맸던 사울처럼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암나귀’가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했다. 첫 번째는 사랑이었다. 사랑을 맘껏 주지도 못하고, 그랬기에 사랑 받고(남편, 아이들에게)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투성인데도 나는 ‘하나님이 그토록 못 잊어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평안했다가 다시 되돌아보면 순종이 아닌 제사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좌절했다. 그리고 나의 불행과 우울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렸던 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랬기에 사무엘이 옆에 있음에도 하나님 없는 예배 중독이 되어버린 사울을 비난할 수 없었다. 끝내 회개하지 못한 사울도, 그런 사울을 끝까지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무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새끼’라며 염려하셨을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했다. 지금껏 아니라고 했지만 ‘악하고 음란한, 이기적인 내 자신의 원수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으로 싸웁니다. 내 욕망에 거슬리는 것이 다 내 원수입니다. (226쪽)’란 말처럼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중심을 잡고 있으면 큰 구원이 이루어져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그럴 때 나, 가정, 교회를 살리는 일임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의미를 희미하게 깨달아갈 무렵 책의 말미에는 북한 선교사님의 입을 통해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탈북을 하고 싶은 이유가 찬송을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탈북을 권하자 할아버지는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며 잠시 기도를 하고 오시더니 울면서 ‘저 아무개 목사가 우리를 돕겠다는데 따라갈까요, 말까요?’란 질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 두는 지 아느냐?’라는 대답이 들려왔다고 했다. 오히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라며 경찰이 오고 있다며 목사님께 어서 가시라고 했다. 목사님이 한 번 더 탈북을 권했지만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압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나는 예배당 종도 쳐 봤고,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도 다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않겠소. 압네다. 압네다.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지요. 264쪽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나는 마지못해서 하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에 물어보는 믿음이며 그럼에도 순종하고 따르는 확신이 내게 있는가 싶어서였다. 나는 여전히 내 육신의 정욕과 싸우고 있다. 그걸 하루도 지키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젠 감추고 싶지 않았다. 고백할 때 악은 사라진다고 했다. 힘이 없어진다고 했다. 필요하면 수없이 고백하고 싸워서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저 할아버지의 믿음을 닮고 싶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순간 깊이 내려와 나는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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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1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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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15: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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