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칸 - My Name Is Kh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스포일러 알림:  이 글은  영화 전반에 관한 줄거리륻 담고 있습니다. 
 

메세지가 없는 영화는 보기 싫다.  코메디는 일주일에 한번 개콘 시청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코메디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다.  상영관을 찾아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책 한 권 까지도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해 보는 시대에 충성스런 일이 아닌가.  이런 충성스런 관객들을 위해 영화는 뭔가 책이나 티비에선 보기 힘든 임펙트 있는 메세지를 줘야 한다고 믿는다.  최소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잔상이 하루 정도는 가줘야 가뜩이나 흉흉한 소식들로 상처받은 관객들을 위무하는 일이 될 것 같다.  천재지변후에 겪는다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보편적인 질환이 돼 버린 시절이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 사제기를 해야 할 판이다.  한미 관계는 그 어느 시절보다 최상을 맞고있다 하는데, 남북관계는 최악이라니 극과 극이 유행인가보다.  첨단 기술력과 세계 최대의 부국 가운데 하나인 이웃 일본은 원전 사고후 수습을 못하고 방사능 물질로 세계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  방사능 때문에 무섭긴 이심전심인데,  무섭다고 대놓고 얘기했다가 국가전복세력으로 몰리기 쉽상이니 조심해야 한다.  이 시절을 기회로 삼아 정부관료들은 번역도 엉망인 FTA를 날치기로 통과시키려다 여당 의원에 발목이 잡히는 웃음을 선사한다. 

이럴 때 영화 한 편의 위무는 얼마나 소중한가?   현실이 목타게 엉망일수록 영화는 가슴을 후련하게 적시는 청량음료 같아야 한다.  카란 조하르 감독의 <내 이름은 칸>의 인상적인 포스트와 포스트에 내걸린 대사 한 마디는, 이 시절을 묵묵히 살아내야 하는 관객들의 답답함을 풀어줄 것만 같다.  그래, 영화속 천재 자폐아 `칸'처럼 관객들도 대통령을 만나고 싶기는 매한가지다.  대통령은 엉망인 세상을 되돌릴 수 있는 권력이 있으니깐.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순전히 포스트속에서 전해오는 어떤 절박함이었던가.  초점없는 흐릿한 눈빛에 배낭을 맨 자폐아 칸이 대통령을 만나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 모든 걸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자폐아에게 대통령을 만나야 할 이유란 역시 순수하고 소박한건 아닐까. 

영화는 워싱턴DC행 비행기를 탑승하고자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칸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어색한 표정과 어리숙한 자태, 백인이 아닌 칸은 공항 검색대원들에게 입과 콧속 까지 검열을 받는 수모를 당한다.  검색을 받으며 칸은 끊임없이 주문처럼 한가지 대사를 반복한다. "제 이름은 칸이고,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 그 대사가 칸의 입에서 반복될수록 이상하게 관객의 귀엔 자신은 이슬람교인이고 테러리스트라고 바뀌어 들린다.  칸의 피부색과 이름이 종교와 신분을 드러내놓고 이제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2001년 9월 11일 이후 현재 미국 공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함축하여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영화는 미국 헐리우드를 빗대 인도의 영화 산업을 뜻하는 볼리우드(Bollywood) 영화다.  볼리우드란 용어조차 희미했던 내게 인도 영화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처음보는 볼리우드 영화가 요즘 예상 밖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한다.  남자 주인공 리즈완 칸 역의 샤룩 칸은 인도의 탐크루즈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섹시나 핸썸이란 수식어와 안 어울리게 이 영화속 그의 자폐 연기는 실제 자폐아를 연상시킬 정도로 완벽했다.  인종과 종교적 편견이 한 자폐아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는 종교 문제로 항상 시끄러운 인도가 집착할만한 충분한 소재였을 것이다. 

4대 종교의 발상지이자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인과 20% 남짓한 이슬람교도 사이에 역사적 종교 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땅이 바로 인도다.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후 종교문제로 인도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파키스탄과 힌두교를 숭상하는 현재의 인도로 나뉘었다.  국가의 분리 후에도 파키스탄과 인도는 카슈미르 지역에 얽킨 종교와 정치문제로 유혈 충돌을 반복해 왔다.  어린시절 영화 속 리즈완 칸의 어머니가 어린 칸에게 말하는 인생의 교훈은 곧장 이 영화의 주제로 가 닿는다.

"이사람은 칸!  이사람은 칼을 든 사람 칼을 든 사람은 나쁜사람, 이사람은 칸!  이사람은 사탕을 든 사람,  사탕을 든 사람은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한단다.  세상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

세상엔 종교인들의 기준처럼 이슬람교도나 기독교인,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있는게 아니라 바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이 기준은 몹시도 유치하고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자폐아 칸에게 엄마의 이 단순한 가르침은 가장 유효한 인생 철학이자 이정표였다.  과연 이 쉬운 가르침은 자폐아 아들만을 위한 엄마표 당의정이었을까 ? 

엄마의 죽음 이후, 동생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칸은 그곳에서 사랑하는 연인 만디라(까졸)를 만난다.  전 남편에게 씻을 수 없는 이혼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만디라에게 청혼하고, 만디라의 아들 사미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지만 그들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엄마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들이다.  힌두교도인 만디라와 이슬람교도인 칸은 사미르가 미국내 종교적 편견으로 희생되고 나서야, 자신들의 종교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과 평화를 이상으로 삼는 종교는 똑같이 사랑과 평화로 지은 그네들의 단락한 가정을 파괴한다. 


영화는 911 이후,  미국인들이 이슬람과 이슬람교인에게 갖는 `이유있는'는 증오와 편견을 낯익은 드라마로 풀어낸다.  세상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특정 종교와 피부색으로 바뀐 삭막한 어메리카에서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고, 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길은 곧 대통령에게 찾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비약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찌보면 이만큼 절박했던 것이라고 돌려 생각할 수 있다.    선량한 자폐아 칸의 꿈은 실현되고, 영화는 대통령을 만나 전형적인 자폐아의 태도와 억양으로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를 고백하는 그를 비추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뭔가 씁쓸하다.  

좋은 영화의 조건은 임펙트한 메세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한가질 더 추가해야 할 듯 하다.  임펙트한 메세지를 어떤 연출력으로 살려 내는가, 하는 점 말이다.  영화 속 대사는 줄곧 심오하고 철학적이다.  철학과 종교의 나라 인도가 만든 영화여서 그럴까?  허나, 감독은 줄곧 미국에 대한 컴플렉스와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낸다. 미국 관객에게 아부하고 싶었을까?  미국 대통령을 만나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그저 칸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영화 속 자폐아의 편집증은 곧 미국 관객의 눈에나기 싫어 안달하는 감독의 평이한 연출력으로 표출된다.   

911 이후, 집단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는 미국인들에게 특정 종교와 피부색은 경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칸의 엄마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말처럼,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언제나 종교나 피부색이 아니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이어야 한다.  911 사건이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증오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나?   감독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점을 파헤쳐야 했다.  미국이란 대국에서 어리숙한 자폐아 칸이,  이슬람교를 갖고 있다고해서,  그의 이름이 이슬람식이고, 그의 피부색이 희지 않다고 하여, 한 사람의 소중한 인권이 침해되어서야 쓰겠냐고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삼아야 했다.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자신의 그저 칸일 뿐이라고 아부하고 공증받는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애둘러 미국의 억압적인 상황을 고발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빈약한 감독의 연출력으론 관객의 상상력이 거기까지 미치도록 돕지 못한다. 
 


세상엔 많은 종교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는 지역과 국가를 하나로 묶어내고, 인류에게 평화와 안식과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전쟁과 학살과 증오와 피를 불러온것도 종교다.  역설적이게도 어떤 경전도 피와 증오를 부추기지 않는다.  피와 증오를 불러오는 것은 오직 종교가 아니라 잘못된 인간의 신앙과 그들의 욕망이었다.  코란을 공개적으로 소각한 미국 목사 테리 존스가 최근 "잘못한게 없으니 뉘우칠것도 없다"고 천명했다.  그의 잘못된 신앙으로 죄없는 아프칸 주재 유엔직원들이 사망했고, 아프칸의 반미시위가 격화되어도 자신은 신앙안에서 떳떳하다고 밝힌 것이다.   진리가 하나인 것은 분명할 테지만, 어떤 지상의 종교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역시 종교가 진리로 인간을 이끈다는 것은 분명할 테지만,  증오를 부추기는 어떤 종교도 그 순간 거짓이 되고야 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이 영화의 임펙트한 메세지는 감독의 빈약한 연출력에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  칸의 엄마는 코란을 인용해 다음처럼 말한다.  "약 무고한 사람 한명을 죽이게 된다면 그건 세상을 다 없애는 것과 같다 "  우리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아 보기에 충분한 영화속 대사 아닌가? 

2011.4.20
개츠비의 영화읽기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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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서 깊이로 -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
윌리엄 파워스 지음, 임현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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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내 독서생활에 위기가 왔음을 직감케 된다.  농담이 아니다.  읽고도 충만하지 못하고, 읽고 있어도 좀더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원인은 무엇일까?  생활인으로서 일과 독서를 조합하기가 힘들다.  바쁜 삶은 창조성을 말살하는 일등공신이다.  독서에 감동이 없는 건 아마도 그것과 연관돼 있을 것이다.  더불어 어느 순간부터 멀리하게 된 고전 독서, 내 독서 생활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신간과 베스트 셀러 위주의 독서 생활이 바로 문제다.  이와 비슷하게 내 삶 전체를 공허하게 하는 것은 또 있다.

얼리어답터는 아니지만, 생활의 모든 것을 최신 전자기술의 도움을 받는다. 넘치는 편의성들.  차안에는 네비게이터가, 사무실에선 업무의 모든 것을 컴퓨터가 제어하고, 집엔 무선공유기를 통해 어느 공간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고,  아이폰을 통해 24시간 네트워크를 떠날 수 없다.  특히 아이폰의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생활의 질을 끌어올렸다.   SNS는 내가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며,  세상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올해 내 수첩에 적어넣은 비전 15가지 가운데 하나가 삶을 스마트하게 만들고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다.  생활은 편리해지고 사람들에게 뒤쳐졌다는 느낌은 지웠지만, 여전히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내 독서생활의 최대의 황금기가 있었다.  까마득하지만, 20대 초입 막 군입대를 앞둔 시절이었다.  겨우 10개월이었지만,  겨울부터 가을까지 나는 줄곧 책만 읽었다.  휴학하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올 날을 기다리던 시간들,  시골집에서 책만 읽고 보낸 시간들에 나는 주로 고전을 읽었다. 그것이 평생 처음으로 시작했던 본격적인 책읽기였다.   철학,문학서를 위주로한 인문서를 탐독했다.  세상에 대한 의문과 인생에 대한 회의가 짙었던 시절,  고전 독서를 통해 만난 역사속의 인간들은 내게 살아갈 분명한 이유와 어떤 감동과 인류의 지혜를 건넸다.  자와 볼펜 하나를 들고,  수많은 고전들을 독파했던 네 계절의 시간들이 내게 준 최대의 보답은 삶을 충만감으로 깊게 채웠다는 것이다.

이제 이십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더 많은 책을 읽었고, 생활은 더 윤택해졌고, 인생의 불확실성은 많이 사라졌다.  고독을 느낄새도 없이 바쁘고 편리하게 시간이 흘러가지만 여전히 나는 그 시절의 충만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슷한 불안과 초초함을 느끼는 사람이 이 시대,  나만은 아닌가 보다.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고,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요한 매체에 정치, 문화, 미디어와 기술에 관련된 글을 기고해온 필진인 윌리엄 파워스는 이 문제를 심도있게 파고든 책을 세상에 내 놓았고 미국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 아마존 베스트 셀러에 오른다.   원제 `Stop! Breathe! Think!<속도에서 깊이로>란 책이다.

저자는 스크린(인터넷)이 세상을 눈부시게 바꿔놓으며 정보 교환의 속도를 높이고,  사람들간의 거리를 좁혀 마치 유토피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왔지만,  실제 사람들의 삶은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정보 기술의 노예로 전락했고 쓸데없는 정보교환에 열을 올리며 중독의 나락에 빠져들었다고 진단한다.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통해 인류 전체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걸 위해 진정 자신 곁의 사람들로부터는 떠나게 되었다.  가족이 모이면 대화가 사라지고 저마다의 스마프폰 속 트친들과 살갑게 대화하기 일수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별 필요도 없는 기사들을 검색하느라 스마트폰과 인터넷 포탈을 뒤지고,  하루에도 시덥짢은 트윗을 수없이 날리고,  그렇게 날아든 정체모를 트윗을 읽느라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어쩌다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알 수 없이 불안 초초가 사람들을 잠식하곤 한다.   이 괴상한 불안 증후군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저자가 이 책에서 스마트 폰을 끄고 인류 고전속의 작가와 철학자를 찾아 떠난 이유다.

신제품의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진다.  자고 일어나면 쓰나미처럼 밀려와 최신, 최고라고 떠벌리는 제품들이 소비자를 희롱하는 시대다.  희롱이 아니라 `우롱'이라고 해야 될까?  사는 순간 구닥다리로 전락시키는 소비전략을 구사하는 마케팅 기법앞에 소비자는 봉이라고 불리워야 하리라. 정보 속도와 `항시접속성' 앞에, 집중할 수 없는 시대에 또한 우린 살고 있다.  글을 쓰다가도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고, 전자책이 상용화 단계가 접어들면 책조차도 넷 상의 분주함속에서 읽어야할 판이다.  끊임없는 정보 중독증에 걸리도록 유혹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깊고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인간의 창조성이 몰입과 여유의 순간에야 한 인간의 삶에 축복처럼 내려앉을 수 있다면, 스크린으로 지구가 점령당한 우리 시대는 스마트 한 시대가 아니라 dumb(바보같은)한 시대가 아닐까?

저자가 이 시대에 발견한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책의 제목처럼 속도를 버리고, 깊이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깊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고전을 읽고 그들의 삶과 철학을 본받아야 한다, 고 주장한다.  이 책속에서 저자가 유독 주목한 고전 작가들은 플라톤, 세네카, 구텐베르크, 세익스피어, 벤저민 프랭클린, 소로, 맥루한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통해 인생의 사소한 분주함과 거리를 두는 법을 가르친다. 먹고 사는 것은 훌륭한 철학이 기본 전제 됐을 때만 오직 의미를 획득한다.  먹고 사는 일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며 이유없이 분주하다.  내, 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나, 를 살찌우기 위해 노력한다.  인생의 근본목적이 내, 가 누구인가를 먼저 배우는 과정이라 하면 어떤가?   전자만을 추구한다면 전형적인 주객 전도다.

외부의 평화와 외부의 만족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절름발이 인생을 산다.  마음, 즉 내부의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은 외부가 고달플 지라도 인생이 훼손되지 않는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바깥이 아수라장이 되어도 내면은 고요할 수 있다', 고 세네카는 가르친다.   마음의 수련이 부족한 오늘 고전속의 대 사상가의 식견은 그 자체로 위안을 주지 않는가?  구텐베르크는 책을 통해 자기 성찰을 이루라고 조언했고, 세익스피어는 최신 도구보다는 오래된 필기구를 통해 인생의 여유를 찾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절제의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 삶의 질서를 창조했고 성공적인 삶에 도달했다.  <월든>의 작가 소로는 어떤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세상이 규정한 성공의 법칙과 정 반대의 삶을 살며 깊고 고요한 인생 철학의 진수를 인류에게 남겼다.  현대의 학자 맥루한은 `지구촌'과 `미디어는 메세지다'란 말을 통해 디지털 세상을 예언했고 그 세상의 부작용을 경계하며 쓸데없이 뜨거운 마음의 온도를 낮추라고 조언한다.

이 책은 최신간이다.  여전히 나는 최신간을 통해, 그들의 해설를 통해 고전을 읽고 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속도에서 깊이로, 라는 책 제목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많은 책 가운데 우선적으로 선택해 분주히 읽어내려간 이유다.  그러나, 실망감도 만만치 않다.  제목만큼 책 내용이 썩 깊이있지 못하다.  스마트폰의 해악과 디지털 스크린의 해악을 설명하는데 책의 반을 허비한다.  시간 낭비다.  후반,  양념처럼 고전 작가와 그들의 언설을 인용해 놓았다.  내가 제 3 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고전을 느리고 깊게 읽어내려가야할 필요성을 깨닫기에 충분한 책이다.  별을 세개 밖에 주지 못한 이유이지만,  별 다섯개를 줄만한 책들이 내 서재에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이 책은 깊이 없는 내 독서를 돌아보게 한다. 

아이폰은 내 생활을 생동감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아이폰 자체는 죄가 없다.  이 책의 저자도 아이폰과 모든 스크린(인터넷도구들)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저자는 줄곧 그래서 중용과 중도를 이야기 한다.  한마디로 잘 쓰자, 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궁여지책으로 주말 이틀간은 모든 스크린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정도까지야 할 수 없겠지만,  이제 나또한 스크린을 현명하게 사용할 분명한 이유를 이 책을 통해 발견했다.  차를 몰면서도,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스마트 폰을 확인하는 버릇을 없애야 겠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고전 독서로 방향을 틀어야 겠다.  꾸준한 독서생활에서도 채워지지 못하는 이 공허감은 분명히 인생을 되돌아보지 못하는 내 가벼운 독서 탓이 크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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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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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4-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책읽는 시간이 줄어드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인것 같네요. 마지막 세문장에 저도 깊이 공감하면서 각오를 다져봅니다.

개츠비 2011-04-20 10:54   좋아요 0 | URL
이 책의 메세지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스마트폰을 끄고 고전으로 돌아가자. 이게 이 책의 전부죠. 그 짧은 설명을 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이 책의 추천보다는 고전 읽기를 권유드리고 싶네요.
 
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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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드라마의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   주인공이 죽는 것이어야 한다.  주인공이 죽는다면 해피엔딩이라 할 순 없다.  그래도 그는 비장하게 죽어야 한다.  죽어버린 주인공은 그 자체로 그를 욕망하던 이들에게 하나의 우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그의 육체가 화학작용을 멈추는 순간,  그는 완벽한 영웅이나 왕으로 되돌아 온다.  이것은 한 인물을 증오하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그의 과오를 감정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객관화의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왕은 죽을 때를 알고 죽어야 신화로 환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성석제의 소설 <왕을 찾아서> 속 그네들의 영웅이자 왕이었던 마사오의 전설이 시작되고 그가 미화되는 지점도 마찬가지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순간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역 조폭, 마사오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은 독자들의 기억속에서 아련하게 쓰러져간 한 영웅의 그림자를 불러온다.   마사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화자는 철저히 어린 시절의 회상과 추억들을 도구로 쓴다.  무소불위의 싸움꾼, 동네 건달, 호색한은 동시에 빈자들의 친구, 정의의 사도, 비열한 조폭들의 희생냥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무엇이 한 시대, 한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마사오는 평가가 불가능한 전설 저 너머에 있다. 소설은 비통하게 쓰러져간 왕을 중심에 놓고,  그의 권력을 탐하고 왕좌를 시시탐탐 노렸던 비열한 군상들의 일면들을 나열한다.  유신조, 조창용, 박재천, 그들 수하들의 모습.  지역 패권을  가진 마사오을 정상에서 끌어내려는 그들의 탐욕은 부질없이 폭력과 살인을 낳고 옛 영웅의 죽음과 새 왕의 대관식을 치룬다.   마사오의 권력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화자에게 마사오가 정통성을 가진 이윤, 오직 어린 시절 나의 기억속에 그가 힘과 비범함으로 존재하였다는 데 있을 뿐이다. 굳어진 권위는 흔들리지 않는다.  패권적인 힘은 굴종하는 인간을 대량생산한다. 

이 수동적이자 마초적인 힘은 이해불가하다.  허나, 모든 권력의 속성이 그와 같다.   권력의 정통성은 권력을 갖게 되는 순간, 획득하는 것이다.  정통성에 근거가 있는것도 아니고 뚜렷한 합법성을 소유하고 있는것도 아니다.  이 소설이 지역 패권을 갖고  오랜시간 통치했던 마사오를 정통의 범위에 두고,  그를 쓰러뜨리려는 외지 패권 조창용과 그의 수하로 돌변한 박재천을 비열한 반역으로 그리려 하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마사오의 정통성을 서사로서 완성하는데 화자인 나, 장원두의 기억은 중요하다.  수많은 유쾌한 추억들로 독자의 흥미를 돋우려는 소설의 전략은 독자에게 마사오의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억을 통해 독자의 동참을 획책한다. 

유머와 가벼움, 추억과 성장담, 인간 내면의 보편적인 본질 등을 성석제의 문장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둔중한 조폭 권력의 세력 다툼을 이야기로 묶어내면서도 문장은 전혀 심각하지 않다.  성장담과 추억속엔 어린 시절에 대한 작가의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유머와 가벼움을 양념처럼 바르고 권력 쟁탈의 과정을 통렬하게 그리면서,  궁극적으로 작가는 생활의 편린과 인간의 권력욕을 담아내는 마술을 보여준다.   허나, 그가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이상하게도 작위적으로 비추이지 않는다. 

"나는 쑥쓰러워하면서 바삭거리는 메뚜기를 씹었다.  그래서 군말 없이 나를 따라나섰던 거로군.  생맥주도 사주고 말이지.  정의의 사도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 가장 수줍어하는 법이다. 그래서 자신이 구해준 숙녀와 소년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석양 속으로 말 타고 떠나는 법. 속으로는 그 숙녀와 천년만년 살고 싶어 미치겠지만. "    P.262  성석제, <왕을 찾아서>

화자는 마사오를 지상에서 가장 강한 사내이자 한 때 그가 가난과 불의, 불평등에 시달리던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고 묘사한다. 그는 아이들의 우상이었고 어른들에게는 왕으로 군림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는지를 의심케 만들만큼 큰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문장은 어떤 신화와 전설의 화법을 차용한 듯 보일 정도다.  그러나 현실에 그러한 `사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나는 전형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의 색채가 진해지는 것은 시간을 거쳐간 인간들의 거대한 욕망이 보태어지기 때문이리라.  신화가 영웅성을 더할수록 한가지씩 거짓말을 보태는 법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잘 생긴 동네 건달 아저씨가 한 분 사셨다.  그분의 집은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 없었던 묘지가 자리잡은 뒷산 자락에 있었다.  집이 아니라 개집보다 조금 큰 정말 `개집'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멀쩡하게 잘 생기시고 꼬마들에게 일장 훈계도 잘 늘어놓던 그 멋진 분이 그런 곳에 사신다는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시절엔 그분이 개집에 산다는것도  우리들에겐 신비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분이 술을 잔뜩먹고 그 개집에서 주무시다 어느 겨울날 얼어죽었다, 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와 꼬마들의 상실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호령할 것 같았던 그분의 기상과 의기,  독특한 주거 환경은 마을 꼬마들의 이상이었다.  소설속 마사오의 일대기를 읽어나가다 내 기억속 왕이 되지 못한 `마사오'을 떠올린다. 

"내 마음의 시생대, 가장 오랜 영토를 지배하는 영원한 왕, 세월이 흘러가도 추억은 남듯이 그가 통치하던 땅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일월이 빛과 그늘에 눌리고 밟혀서 묵은 책 속의 검은 활자처럼 단단하고 납작하게 고정되어 있다.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마사오가 죽은 것이다. 마침내, 드디어, 이윽고 때가 되어 그의 육체에도 안식이 찾아들었다."   P.9  성석제 <왕을 찾아서>

권력을 찾아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인간들의 일대기를 그리며, 권력의 허망함과 권력앞의 비열함을 그려내려한 소설은 지역을 떠나 국가, 세계의 권력 속성과 중첩된다.  권력을 획득하는 자가 정의도 획득하는 세계에 우린 살고 있다.  마사오의 1인 독재는 현실마냥 영원하지 못했다.  여왕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왕을 남편으로 맞이하면 된다는 `세희'의 상승에의 욕망과 조폭끼리의 의리보다 화려한 처세술로 왕의 자리에 등극하는 세희의 남편 `재천'은 우리 세대, 권력획득의 표준 메뉴얼처럼 읽힌다.  마사오에 대한 나, 장원두의 아려한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설속의 나,  장원두가 걸어들어간 안개와 회오리바람이 피어오르는 저 흐릿한 계곡 너머의 `지역'이나 매일 먹는 밥처럼 맛이 없는 일상이 내려앉은 우리 곁의 세상에서나, 그 완벽한 그리움을 대체할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죽음이 영웅의 신화를 짓듯이,  인간의 끝없는 갈망은 아련한 그리움을 낳을뿐이다.

성석제의 소설을 접하기는 처음이다.  그간 신문,TV 등을 통해 관련 기사나 작가의 기고글, 혹은 인터뷰, 여행기 등을 읽고 보아온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성석제는 유머와 농담을 자신의 글속에 담아내길 즐기는 작가로 알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의 재능을 맘껏 발휘한다.  농담과 유머가 소설 전체를 감싸고 있다.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문장을 유머로 비트는 능력이 놀랍다.  독특한 것은 문장의 완성도가 처음보다 뒷부분으로 넘어갈 수록 좋아진다는 점이다.  초판이 발행된 것이 15년이 지났고 아마 그는 신출내기 작가로 이 작품을 구상하고 써내려갔을 것이다.  문장의 완성도가 상승하는 형태라면,  서사의 완성도는 후반부로 갈수록 흐릿해진다.  서사 골격의 완성도를 높였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점이 아쉽다.

이 소설은 독자들의 무의식 속에 잠든, 왕 마사오를 깨웠다.  우리가 되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자극한다.  비록 그것이 지금은 아련한, 아릿한,  그 무엇일지라도 한 편의 소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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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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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4-15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도 생각나게 하는 그런 마사오네요.

개츠비 2011-04-20 10:55   좋아요 0 | URL
성석제식 소설 쓰기의 진수를 느끼기게 충분한 소설이지만, 초기작이라 그런지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소설을 수정보완한다면, 충분히 좋은 소설이 될거라 믿습니다.
 
Hello! 멘토 - 감성이 있는 행복한 성공 이야기
곽숙철 지음, 설레다 그림, 윤푸빗 스토리 / 틔움출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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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7년차로 접어든다.  이제 막 7년차 테이프를 끊었다.  현 직장에 들어오기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 직장에 들어와 내 삶은 역전을 이루었다.   헐렁한 운동복 차림으로 매일 수험서를 잡았던 백수 시절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환골탈태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출근할 직장이 있고 내가 목숨걸고 해내야할 직장 내의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직장에 들어와 결혼을 했고,  예쁜 딸 아이를 낳았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살 집 한 채를 갖게 되었다.  백수 생활을 하던 시절, 내 통장 잔고는 나날이 비어갔고 생활은 마이너스로 치달았다.  우울과 불안이 어두운 장막처럼 나의 이십대를 감싸안았다.  직장만 들어가면 만사형통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그 시절을 생각하자니 고달픔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물론 현직장에서 안착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처럼 내 사회생활도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사회생활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경험한 순간들이 지금 아스라이 떠오른다.  경험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 법이다.  인생이 그렇듯, 한가지 기쁨이 찾아오면 한가지 난관이 나를 향해 견제구를 날렸다.   그동안 상을 받았지만, 벌도 받았다.   상은 달콤했지만, 벌은 너무나 아렸다.  행복할 때 고난을 생각하라, 는 교훈을 직접 체험하고 보면 옛성현들의 말씀이 하나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문제와 싸운다.  사회생활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던지워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다.  한 시절을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언제나 달콤쌉쌀한 멘션을 날려주었던 한 직장 선배 덕분이다.  나름 내 앞길 정도는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나 그분의 멘션을 들을 때면 언제나 나의 좁은 시야와 식견을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멘토와 그의 멘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는 직장에 들어와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내가 자기계발서를 꾸준히 읽어나가는 것은 이같은 멘토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책에서 우린 좋은 멘토와 그들의 훌륭한 멘션을 만날 수 있다.  독자가 믿을 만한 멘토를 만나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 있다면, 한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다.  곽숙철의 <Hello! 멘토>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생활 초기의 우여곡절이 생각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기계발서가 뜬구름 잡기식의 허황된 얘기만 쏟아낸다는 편견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자를 격려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지만,  한가지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지금껏 내 경험이 이 책의 멘션들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저자 곽숙철은 30년간 LG전자의 주요한 부서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고, 최근에는 LG전자 혁신교육센터장과 블루오션학교장을 맡으며 임원과 사원들을 상대로  혁신 교육의 수장으로 일했다.   현재 CnE 혁신연구소 소장이며 일주일에 두번 1만명이 넘는 회원에게 통찰력이 가득한 혁신메세지를 발송하고 있다.  나또한 그의 메일링을 두 해 째 받고 있는데, 내면을 깨우는 강렬한 메세지가 직장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준다.   그의 신간 <Hello! 멘토>가 특별한 것은 이 책이 네이버의 블로그 이웃들과 협업 과정을 거쳐 출간되었다는 데 있다.  곽숙철은 핵심적인 멘션을 달았고,  설레다의 토끼 그림은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며,  윤푸빗의 스토리텔링은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초면인 블로그 이웃들로 만나 이런 프로젝트를 수행할 정도로 팀웍을 만들어냈다니, 그저 놀라운 뿐이다.  블로그라는 가상적인 공간의 사람들이 만나 책이라는 가장 확실한 현실 세계의 창작물을 생산해 낸 것이다.  책의 주제가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책의 제작 과정이 이미 꿈의 구상과 실현을 시현해 낸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곽숙철의 <Hello! 멘토>는 여느 평범한 직장인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내는 과정을 슬기롭고 재미있게 그리고 있는 책이다.  

책의 주인공 설토는 여행사 총무팀의 대리로 여느 초년 직장인 못지 않게 좌충우돌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작가의 꿈을 갖고 있는 그는,   여행사에 들어오면 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녹지 않다.  때는 12월, 블로그에 올린 그해 위시리스트를 검색해 보곤 깊은 실의에 빠진다.  해놓은게 하나도 없이 한해가 가고 여행작가의 길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 하다.  그 때 구세주처럼 블로그 이웃 솔개가 나타나 그에게 댓글을 단다.  설토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멘토 솔개의 등장이다.  이 이야기를 독자들은 자신의 생활에 대입시켜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을 듯 하다.  연초면 우린 얼마나 부픈 그해의 꿈을 리스토로 작성하는가.  그러나 연말은 언제나 실망하기 마련이다.  모든 이가 꿈을 꾸지만 꿈을 이루기란 어렵다.  더군다나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러니 술과 담배 향락이 인생을 먹어치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공허로 가득찰 수밖에 없다.  꿈, 그것은 진정 우리를 살게 하는 위대한 추동력인 것이다. 

설토는 이웃 솔개로부터 통찰력이 가득한 에피소드 100개를 섭취, 소화한다.  그리고 꿈을 이룰 놀라운 능력자로 환생한다.  통찰력의 황홀한 융단폭격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의 에피소드는 모두 스토리텔링의 형식을 갖고 있다.  구호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다.  이 책의 흡인력은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당의정같이 겉은 달콤하지만, 속엔 깊고 쓴 인생의 명약이 들어 있다.  책 100권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러나 경제적이지 못하다. 이 책 한 권은 통찰력의 엑기스와 같다.  이 에피소드는 꿈을 꾸는 설레다를 격려하고 자극하고 행동하게 한다.  그를 변화시킨다.  멘션의 궁극적 목적은 변화가 아닌가.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멘션엔 힘이 담겨 있다.  감동이 없다면 사람을 움직일 수 없고, 공감이 없으면 행동을 이끌어낼 수 없다.  솔개의 멘션엔 독자의 행동을 변화시킬만한 통찰력이 가득하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로 복음을 전하러 갔답니다.  그 지역 원주민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먼 길을 걸어가 물을 길어오는 게 하루의 일과였어요. 선교사는 그들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게 너무도 힘겨워 보였지요. 혹시나 해서 선교사는 동네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다가 드디어 수맥을 발견했어요. 기쁜 마음에 선교사는 마을의 추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어요. " 마을 어귀에서 수맥을 발견했으니 우물을 팝시다." 추장은 내일 부족 회의를 열어 상의해 보겠다고 했어요. 선교사는 당연히 우물을 파자는 의견에 동의할 것으로 믿었지요. 하지만 부족 회의의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추장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물 길러 다니느라 바빠서 우물을 팔 시간이 없습니다.' 설토님, 미래를 바꾸려면 바쁜 일보다 중요한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     곽숙철, <Hello! 멘토> p.14 

미숙한 초년병 설토는 지혜로운 솔개의 멘션아래, 직장내의 문제를 하나씩 풀어내며 일취월장 승승장구한다.  적극적인 자세로 업무에 나서고,  사람간의 피곤한 관계를 활기차게 바꾸어 놓으며, 용기를 내어 부서간 이동을 하더니, 결국엔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설토의 꿈은 여행 작가가 되는 것이고 그는 그 꿈을 실현시킨다.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다.  블로그의 여행기가 그를 구원한다.  매우 낭만적인 결론이지만, 불가능한 일도아니다.  우린 그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봐 왔다.  이미 이 책이 바로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블로거들이 협업하여 책을 내자는 것은 그저 구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예쁜 책은 지금 내 손에 담겨 있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사회 생활이나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복병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릴 습격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이며, 그 태도는 선택의 문제다.  멘토의 멘션은 올바른 선택에 갈잡이가 되어 준다.  하지만, 결국엔 모든 결정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  삶은 고독한 것이다.  그러니 우린 자만하지도 우울해하지도 말 일이다. 지혜롭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책은 사회 생활을 막 시작하는 초년병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당신이 직면한 문제에 힌트를 줄만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직장 생활의 노하우를 얻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알맞은 책이다.  지혜로운 멘토와 귀여운 토끼가 당신의 천편일률적 생활에 변화의 터닝포인트를 안길 것이다.  꿈을 간직한 모든 직장인들에게 특히 영감을 불어넣는 책이다.  책의 주인공 설레다는 여행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지만, 결국 작가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인생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란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결국,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솔개는 그런 설레다에게 마지막 두 가지 멘션을 날린다.  인상적이다.  기가막힌 닭튀김 요리법을 개발했다고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사업 제안을 요청했지만 무려 1009번째에서야 승락을 받은 65세의 무일푼의 미국인은 KFC를 창업한 커넬 샌더스 할아버지였다.  꿈이 있다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솔개의 마지막 멘션은 단순 명쾌하다.  그러나 꿈을 앞당기는 비책이 그 안에 담겨 있다.  "Do it Now! "  그러니, 우리도 나이를 잊고 시작하자 ! 

이 책엔 직장 생활에 관한 풍부한 지혜와 힌트가 담겨 있다.  당신이 꾸는 꿈이 정당함도 확인받는 기회가 될 것이다.  블로그 이웃들의 성과물인 이 책을 통해 모든 위대한 결실은 협동과 협업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당신이 회사의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할 이유다.  사람의 꿈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오늘을 견디어 내고, 내일을 갈망하게 하는 것은 꿈이 가진 강력한 추동력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당신은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의 꿈에 지혜로운 멘션을 날려줄 위대한 멘토를 갖고 있는가?   멘토는 당신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당신이 갈망할 때에만 오직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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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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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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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이다. 봄볕이 따스하다. 가끔 생을 휘감고 있는 습관적인 우울이 나를 잠식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해야 할 일 외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위로하고 싶지도 않다.  책은 읽히지 않고 몸은 이유없이 무겁다.  긴 겨울 끝에 찾아든 봄은 나를 짓누르는 기운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은 정상이나 영혼은 유폐되어 있다.  이 섬뜩한 감정은 삶의 곳곳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보인다.  항상성에 대한 욕망이 유일한 브레이크다.  이렇게 따스한데 봄볕 한 가운데 곰팡이 같은 우울이 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든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우울은 생의 수렁이니까.  호르몬의 작용 같은 것일게다.  육체는 영혼을 감쪽같이 속인다.  무력감을 해치우기 위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방미진의 소설을 읽은건 선택일까? 우연일까?  솜털처럼 우울도 가볍다는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방미진의 소설 <손톱이 자라날 때>을 읽은건 잘한 일이다.  우울함이 보편적인 증세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글이니까.  이 소설집엔 다섯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유일한 중편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곤, 모두 단편이다.  최근에 가장 빠르게 읽은 소설이다. 

우울의 원인은 사소할 수 있다. 소화불량 같은거라면 어떨까?  농담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이 풍선처럼 확대된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쉽게 즐겁고 쉽게 우울하다. 그들의 자아가 유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불안을 확대한다.  방미진은 이 우울한 자아를 교실속에 방목한다.  그들은 하얀 벽이 둘러쌓인 교실에서 방목되는 타인과 유동하는 또다른 자아들과 섞인다.  갈등을 경험하는 장소로서 교실은 최적의 장소다. 그러나,  어떤 장소건 이면이 존재한다.  방미진의 소설속 공간, 교실은 경쟁이 움트고 증오가 삭트고 미움이 부유하는 곳이다.  일면 그럴 수 있다. 허나, 온전히 그렇진 않다.  장소는 상대적인 공간이다.

[하얀벽]안의 기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고, 나는 가해자다. 괴롭힘을 당하는 기주는 괴롭히는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그닥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자만으로 가득차 있다. 예쁘고, 똑똑한 나를 타인은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게 이상하다.  기주는 못생겼고,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무시당해도 될만한 외모, 태도, 기주가 당하는 일들은 기주가 불러온 것들이라 난 생각한다. 위압적인 선생님, 이기적인 아이들, 나를 제외하곤 모두 옳지 않다.  어느날 선생님은 기주의 전학을 통보하고, 벽에 못을 박다 손가락이 으깨진 선생님도 교실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아이들에게 `나'는 기주를 대신해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사각의 교실을 구획하는 하얀벽은 은폐된 진실을 알고 있다.  기주도, 나도, 선생님도, 이기적인 아이들도, 모두 벽처럼 무딘 존재들은 아니었다. 나는, 말랑하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벽을 상상한다.  한껏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존재들이나 그것은 아직 상상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 한계.  

"축축하고 물렁한 벽이 등 전체로 느껴졌다.  손처럼 내 어깨를 짚은 벽이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벽이 말했다. "그래, 이젠 네가 내 얘기를 들어 줄 차례야."   p.52 [하얀벽]

[난 네가 되고] 속, 쌍둥이 자매 주영과 지영. 사고로 주영은 죽었다.  항상 비교되어온 지영은 주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절묘한 기회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주영을 대신, 지영은 주영이 된다.  삼촌을 속이고, 선생님을 속이고, 아이들을 속인다. 부모에게,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언제나 지영은 왜 주영보다 못하냐? 란 말을 들어왔다. 그 마음속에 움튼건 주영에 대한 미음과 증오 뿐이다. 죽은 주영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사라지고, 비교되는데 익숙해온 아이는 철저히 주영을 연기하는데 열중한다. 어느날, 아이들이 자신이 주영을 연기한다는 걸 알고도 속아준 사실에 분노하지만, 더 철저히 죽은이가 지영임을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주영이 되었다. 허나, 본래의 자신을 죽여버린 아이는 문득 못난 `지영'에 연민을 느낀다. "좋아해 줄걸. 한번이라도 나를 좋아해 줄걸. 이렇게 사라져 버릴 지영이란 이름을." p.84 [난 네가 되고]   이 괴기스런 마음은 전혀 아이답지 않다.  어쩌면 그게 편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아를 지키고 살 수 없는 세상을 교실은 연습하게 한다.  교실이 요구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당하는 아이, 지영은 자신을 자해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아이의 눈으로 사회를 보게 하는 작품이 완성도 있는 문장으로 실려 있다. 방미진의 <붉은 곰팡이>는 가난한 가족이 찾아들어간 지하 월세방에서 곰팡이와 섞여 산 몇 개월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놀랍도록 사실적인 문장들은 어쩌면 작가의 경험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단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집의 중심에 놓여 이 작가의 색깔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가난, 월세방, 아버지의 무능, 엄마의 히스테리, 나의 반항, 철부지 동생의 무고함이, 치우면 치울수록 번져나가는 곰팡이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융합하지 못하고, 독단적인 교실속의 자아가 어쩌면 사회적인 궁핍과 곤란이란 환경속에서 자라났을 수도 있음을 의심케 해준다.  아이의 눈으로 자신의 가족이 그리고 자신이, 이 사회속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는 지하방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묘사하는 모습에선,  작가의 체념과 상실감이 짙게 드리워진다.  유동하는 자아를 감금하고 있던 교실의 하얀벽은 이제 곰팡이가 피어난 벽이 대신한다.

"얼른 돈 벌어서 좋은 데로 가야지", 엄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섯 살 난 동생이 찡찡거리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엄마는 동생을 안고서 그 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p.97  [붉은 곰팡이]

표제작 <손톱이 자라날때>와 마지막으로 실린 <고누다>는 역시 전편이 갖고 있던 교실안의 무기력과 냉소, 원인없는 증오와 미움이 극단적인 폭력과 환각 살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아 도취에 흠뻑 빠진 아이는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아이들을 할퀴고, 손을 들어 총을 쏘는 모습으로 호흡하는 모든 존재를 환각 살인한다. 이야기는 여느 교실처럼 사소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은 캐리커처 처럼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폭력의 극단성은 손톱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환상을 통해, 교실안의 1인자를 꿈꾸고 맘에 들지 않는 존재들에게 총을 겨누어 진짜와 가짜를 인위적으로 나누고 상상살인을 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모두가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면, 소설로서의 서사로 읽힐 수 없는 것들이다.  여느 여고생의 일기장에 실린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미움과 증오의 언설들 같다.  만약, 중편 <붉은 곰팡이>가 아니었다면, 독자로서 화가났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것은 내 독해의 한계일지도 모르지.  내 생각엔  <붉은 곰팡이> 한 편으로도 이 소설집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어찌되었든,  봄바람과 함께 내 영혼에 날아든 우울의 기운이 대책없이 음울한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 휘발되고 말았다. 

굳이 소설속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의 학창시절 유동하는 자아는 충분히 능욕을 당했으리라. 그 시절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감수성이 더 예민한 아이들의 고통은 더 심했겠지. 그러면서 아이의 자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생의 어느 시기엔 영혼의 내진 설계가 필요한 법이다. 세상풍파에 쉽게 쓰러지지 않을 그런 웃음과 여유를 영혼에 장착해야 한다. 인간을 어느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 시절엔 아이였기 때문에 비관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항상 자아는 생안에서 불완전하고 유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봄이 왔다. 우울해서 더 음울한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 마음의 간사로움은 이미 예고된 회복기로 나아갈 것을 부추긴다.   탈탈 털고 일어나야겠다. 따스한 봄볕에 습한 우울을 말리고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 " 사람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떻게 존재할지,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결정을 내린다. "  그러면 이제, 긍정,희망,즐거움,기쁨 이런 단어들을 억지로라도 생각해볼까?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와 하루를 보내는거다.   인내와 성실, 이 추상명사엔 답답하지만 삶의 진실과 결실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한다.   쓰나미에 모든게 휩쓸려간 사람들앞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존재들앞에, 우리의 긍정은 당연한 결론이다.  건강히 존재할 수 있음에 우린 여전히 긍정하고, 희망해야 한다.  그게 지금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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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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