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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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을 읽은 계기는 영화 <사도> 때문이었다.  영화 <사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초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바로 <한중록>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믿을 수 있는 객관적 사료라고 하지만 사건의 실체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선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기록이 우선이다. 사건을 겪은 1차 관계자가 아니라면 그 내밀한 역사의 깊이와 사연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한중록>이 역사적 진실의 정확성에 대한 오해와 억측에도 여전히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것은 이 책 저자의 위치와 신분 때문이었다. 


<한중록>을 지은 이는 혜경궁 홍씨다. 그녀는 열살 나이에 사도세자의 아내로 간택 돼 궁중에 들어왔다.  사도세자는 일평생 `광증'을 보이며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성미 까다롭던 영조는 혜경궁을 며느리로 맞이하던 날, 그녀를 앞에 두고 궁중생활의 예법에 대한 일장 훈계를 늘어놓을 정도로 예민하고 세심했다.  또, 그녀는 영조의 대를 이은 후계자 정조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여인이었지만, 그 70년 궁중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한중록>은 이렇듯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80년 전 생이 오롯이 담겨 있는 기록물이다. 


<문장강화>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 이태준은 <한중록>을 일컬어 `조선의 산문 고전'이라 높게 평가했다. 이 책은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현대 독자의 관점에서 <한중록>의 기록은 역사이지만, 그 표현방식은 지극한 고백이자 인간적 절규에 가깝다. 결국 사실과 고백이 뒤섞인 이 책은 역사를 문학으로 읽게 만들며, 한 시대의 촘촘한 사건들과 한 인간의 상처받은 영혼을 만날 수 있게 돕는다.  조선의 권력 상층부, 그 어떤 여인도 감히 역사와 문학이 혼용된 기록물을 후대에 남겨놓지 못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기억력이 특출나고 총명해, 한번 들은 이야기는 절대로 잊지 않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중록>의 독자들은 정조의 말에 수긍하게 될 터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세 차례의 회고록을 묶은 책이다. 혜경궁이 이 책을 지은 목적은 친인척의 청탁에 의해서였다. 61세 때인 1795년에 혜경궁은 조카 홍수영의 부탁을 받고, "나의 일생(이하 역자 명명)"으로 이름붙여진 `간이 자서전'을 써줬다.  정조가 죽고 얼마 후인 1802년엔 순조의 생모, 가순궁이 자손들도 알 수 있도록 사도의 삶에 대해 들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 남편 사도세자"를 썼다. 정조가 죽고 혜경궁 친정인 홍씨 가문이 위태롭게 되자 "친정을 위한 변명"이란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다. <한중록>을 지을 당시, 혜경궁은 "집안이 망한 아픔에 화가 치밀어 등이 뜨거워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고 썼다.  왜 혜경궁은 최고 지존의 자리에서도 일평생 분노와 고통에 휩싸여야 했을까.


10살 나이에 동궁의 비가 되어 후세 권세를 예약했던 혜경궁의 운명은 뜻밖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극으로 치달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내 남편 사도세자>의 서문에서 그녀는 `임오화변(1762년 5월, 사도세자 뒤주 살해사건)'의 실체를 자신만큼 잘 아는 이가 드물며, 자신의 기록이 거짓이면 하느님의 죽이심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장에서 혜경궁이 주장하는 뒤주사건의 진실은 영조가 사도에게 자애가 없어 그가 서서히 미쳐갔고, 일의 전후를 떠나 미친 자식이 날뛰니 영조는 종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혜경궁이 이 일에 관해 분명한 사실 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은 임오화변에 관한 공식 역사기록이 훼손된 것도 이유였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전에 영조에게 상소해, 임오화변에 대한 승정원(왕의 비서실)의 기록을 없애달라고 조른다.  정조 입장에서 아비 사도의 괴이한 죽음이 즉위 후 부담이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소문들이 권력암투 가운데 번져나갔다. "사도가 병환이 없는데 영조가 신하들의 헐뜯는 말에 넘어가 자식을 죽였다"거나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 등이 권하여 뒤주를 들여오게 했다"라는 풍문이었다.  혜경궁 입장에선 이런 소문들은 곧바로 친정을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고 느꼈다. 


왕의 외척이 된 혜경궁 홍씨 가문은 그녀가 궁에 들어오면서부터 입신하고 권세를 누린다. 혜경궁이 지극히 애틋하게 생각하는 아비 홍봉한은 삼정승의 자리를 두루 거쳤고,  병권과 재정을 총괄하는 자리를 오고가며 실세로 살았다.  작은 아버지 홍인한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의 왕비가 된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와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크고, 또 정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권력구도의 물갈이가 필요해졌고 많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혜경궁 홍씨 가문은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게 된다.  <한중록>에서 분노와 절규에 떠는 혜경궁의 목소리는 다름아닌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싸움 가운데 들려오는 `비명소리'였던 것이다. 


"내 목숨이 아침 저녁 사이에 왔다갔다하니, 쓴 것을 주상의 어미인 가순궁에게 맡겨, 내 죽은 후라도 주상께 드리고자 하노라. 주상께서 내 겪은 바의 흉험함과 내 집 당한 바의 원통함을 알아 삼십 년 쌓인 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오면, 내 죽은 넋이라도 지하에 간 정조를 뵙고, (중략..) 모자의 평생 한을 이룬 것을 서로 위로하리라.  내 이 글에서 한 터럭이라도 꾸미거나 과장한 것이 있으면, 이는 위로는 정조를 무함한 것이고 아래로는 사사로이 우리 집만 두둔한 것이니, 내 어찌 하늘의 재앙이 무섭지 않으리오."  295쪽, 혜경궁 홍씨, <한중록>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놀랍도록 일관되게 친정의 어른과 자손들까지도 우상화에 버금가는 표현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날 아버지 홍봉한이 뒤주 아이디어를 냈는냐, 안냈느냐가 훗날 정조시대 상당한 논란이 됐다.  만약 뒤주 아이디어가 홍봉한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면 그는 역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 혜경궁은 그날 아버지 홍봉한의 궁중 동선을 거의 시간대별로 서술하고 있다.  정조가 즉위하자 곧 유배되어 사사된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도, 혜경궁은 일관되게 작은 아버지의 무혐의를 주장했다.  혜경궁의 친정 우상화의 압권은 다섯 살 막내 동생이 궁에 들어와 하는 행실과 사람을 아는 눈썰미가 어른과 같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는 표현에서 극에 달한다.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 집안의 모든 인사에 대한 서술형식이 대개 이런 식이다.  홍씨 집안 뿐만 아니라 그 친척까지도 무척 긍정적으로 표현해 놨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배다른 후손들을 평가하는 것이나 김귀주로 대표되는 정순왕후 외척 세력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결코 인심이 후한 사람이 아니라는게 드러난다. 그들을 천하의 후레자식이나 역사에 다시볼 수 없는 역적으로 묘사한다.  오늘날의 독자 입장에서 혜경궁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의 권력다툼은 누가 선이고 악인지, 분간할 수 없다.  그저 왕의 외척 세력간 피터지는 권력싸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순왕후 측에서 <한중록>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편파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중록>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는 평가절하 할 수 없다. 20세기 작가 이태준이 조선을 대표하는 산문 고전이라 평했듯, 이 작품을 문학으로 대한다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문학의 본질은 `팩트'와는 별 관계가 없다.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이 곧 진실이 되는 것, 그게 문학이다.  혜경궁의 인생사 80년이 압축된 이 기록물은 이 땅에 살았던 한 여인의 내면 깊숙한 곳을 탐색할 기회를 준다.  그녀가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말년에 기억을 더듬어 <한중록>이란 글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기록속에서 드러난 혜경궁의 절절한 아픔과 고통의 정체는 지위나 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것이다.  아비에 대한 애틋함, 친정에 대한 호의, 아들에 대한 모정이 그렇다. 


혜경궁은 세자비의 지위에서 사도의 죽음을 통해 하루아침에 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로 내몰렸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의 아들 정조와 혜경궁의 운명도 바람앞에 촛불과 다름 없었을 테다.  일평생 권세를 누린 아버지가 말년에 모든 권력을 잃고 역적의 지위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작은 아버지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아들 정조를 먼저 떠나보냈으며,  그가 죽자 아끼던 셋째 동생 홍낙임은 정치보복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 불안과 죽음, 공포의 시간들에 관한 묘사가 <한중록>의 주요 테마였으며, 그것은 역사가 아닌 한이 서린 문학으로 옮겨갔다.


" 그날 내가 세손(정조)을 데리고 친정으로 나가니, 그 망극한 경상이야 이를 것이 있으리오. 임금(영조)의 하교가 우리 모자를 살려주겠다고 하시고, 아버지께 세손을 보호하라 이르시니, 내 망극한 상황에도 성은을 감축하여, 세손을 어루만지며 `우리 모자 몸을 보전하여 성은을 갚자 그리고 아버지의 서러움을 이어 착한 아들이 되라' 경계하니라. 우리 모자 서로 의지하여 목숨은 보전했지만, 천지간 한없는 설움이야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   212쪽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자신의 기록이 `한 터럭이라도 꾸미거나 과장한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진한 역사가나 독자는 없다.  사관이 아닌 개인의 입장에서 쓴 글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곡해될 수밖에 없다.  <한중록>은 사람들의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쳐 쓰여진 책이 아니다.  객관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자유롭게 서술한 책이다.  하여, 혜경궁 홍씨의 삶과 고통이 한없이 불운하였다치더라도 그것을 공정한 역사의 심판대에 세울 잣대로 쓸 순 없는 것이다.   


<한중록>은 18세기의 역사안으로 21세기의 독자를 초대한다.  그러나, <한중록>만이 18세기의 조선을 제대로 그려내는 사료이기에 오직 그것으로만 18세기의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행여 있다면 어떨까.  일인 우상화와 권력 세습에 능한 북한이 역사에 대한 하나의 견해만을 고수하는 것은 왜인가.  독재국가는 생각의 통일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제외하곤 역사를 다루는 태도는 언제나 다양한 견해의 표출을 허락하고, 그 견해 간의 논쟁을 거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교훈을 얻는 쪽으로 발전한다.  민주국가에서 역사와 학문이 발전하는 표준적인 절차가 그런 것이다. 


하여,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열린 토론과 합의를 무시하고, 역사를 자신의 생각만으로 틀지우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를 `광인(狂人)' 아니면 `독재자'라 부르는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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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5-11-0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중록은 실제로 꽤 재미있지요. 다만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조금의 비평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할 일입니다. 혜셩궁 홍씨의 입장을 감안하고 읽지 않으면 반쪽짜리가 되지요.

개츠비 2015-11-22 10:26   좋아요 0 | URL
동감합니다. 비평적 독서의 필요성이 절실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