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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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이다. 봄볕이 따스하다. 가끔 생을 휘감고 있는 습관적인 우울이 나를 잠식해 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해야 할 일 외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를 위로하고 싶지도 않다.  책은 읽히지 않고 몸은 이유없이 무겁다.  긴 겨울 끝에 찾아든 봄은 나를 짓누르는 기운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은 정상이나 영혼은 유폐되어 있다.  이 섬뜩한 감정은 삶의 곳곳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것은 변함없이 보인다.  항상성에 대한 욕망이 유일한 브레이크다.  이렇게 따스한데 봄볕 한 가운데 곰팡이 같은 우울이 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든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우울은 생의 수렁이니까.  호르몬의 작용 같은 것일게다.  육체는 영혼을 감쪽같이 속인다.  무력감을 해치우기 위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방미진의 소설을 읽은건 선택일까? 우연일까?  솜털처럼 우울도 가볍다는 진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방미진의 소설 <손톱이 자라날 때>을 읽은건 잘한 일이다.  우울함이 보편적인 증세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글이니까.  이 소설집엔 다섯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유일한 중편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곤, 모두 단편이다.  최근에 가장 빠르게 읽은 소설이다. 

우울의 원인은 사소할 수 있다. 소화불량 같은거라면 어떨까?  농담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이 풍선처럼 확대된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쉽게 즐겁고 쉽게 우울하다. 그들의 자아가 유동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불안을 확대한다.  방미진은 이 우울한 자아를 교실속에 방목한다.  그들은 하얀 벽이 둘러쌓인 교실에서 방목되는 타인과 유동하는 또다른 자아들과 섞인다.  갈등을 경험하는 장소로서 교실은 최적의 장소다. 그러나,  어떤 장소건 이면이 존재한다.  방미진의 소설속 공간, 교실은 경쟁이 움트고 증오가 삭트고 미움이 부유하는 곳이다.  일면 그럴 수 있다. 허나, 온전히 그렇진 않다.  장소는 상대적인 공간이다.

[하얀벽]안의 기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고, 나는 가해자다. 괴롭힘을 당하는 기주는 괴롭히는 나와 아이들 사이에서 그닥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자만으로 가득차 있다. 예쁘고, 똑똑한 나를 타인은 좋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게 이상하다.  기주는 못생겼고,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무시당해도 될만한 외모, 태도, 기주가 당하는 일들은 기주가 불러온 것들이라 난 생각한다. 위압적인 선생님, 이기적인 아이들, 나를 제외하곤 모두 옳지 않다.  어느날 선생님은 기주의 전학을 통보하고, 벽에 못을 박다 손가락이 으깨진 선생님도 교실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 아이들에게 `나'는 기주를 대신해 소외되고, 무시당한다. 사각의 교실을 구획하는 하얀벽은 은폐된 진실을 알고 있다.  기주도, 나도, 선생님도, 이기적인 아이들도, 모두 벽처럼 무딘 존재들은 아니었다. 나는, 말랑하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벽을 상상한다.  한껏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존재들이나 그것은 아직 상상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 한계.  

"축축하고 물렁한 벽이 등 전체로 느껴졌다.  손처럼 내 어깨를 짚은 벽이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 벽이 말했다. "그래, 이젠 네가 내 얘기를 들어 줄 차례야."   p.52 [하얀벽]

[난 네가 되고] 속, 쌍둥이 자매 주영과 지영. 사고로 주영은 죽었다.  항상 비교되어온 지영은 주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절묘한 기회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은 주영을 대신, 지영은 주영이 된다.  삼촌을 속이고, 선생님을 속이고, 아이들을 속인다. 부모에게, 아이들에게, 선생님께 언제나 지영은 왜 주영보다 못하냐? 란 말을 들어왔다. 그 마음속에 움튼건 주영에 대한 미음과 증오 뿐이다. 죽은 주영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사라지고, 비교되는데 익숙해온 아이는 철저히 주영을 연기하는데 열중한다. 어느날, 아이들이 자신이 주영을 연기한다는 걸 알고도 속아준 사실에 분노하지만, 더 철저히 죽은이가 지영임을 주장한다. 이로써, 그는 주영이 되었다. 허나, 본래의 자신을 죽여버린 아이는 문득 못난 `지영'에 연민을 느낀다. "좋아해 줄걸. 한번이라도 나를 좋아해 줄걸. 이렇게 사라져 버릴 지영이란 이름을." p.84 [난 네가 되고]   이 괴기스런 마음은 전혀 아이답지 않다.  어쩌면 그게 편견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이란 이래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아를 지키고 살 수 없는 세상을 교실은 연습하게 한다.  교실이 요구하는 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당하는 아이, 지영은 자신을 자해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아이의 눈으로 사회를 보게 하는 작품이 완성도 있는 문장으로 실려 있다. 방미진의 <붉은 곰팡이>는 가난한 가족이 찾아들어간 지하 월세방에서 곰팡이와 섞여 산 몇 개월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놀랍도록 사실적인 문장들은 어쩌면 작가의 경험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단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집의 중심에 놓여 이 작가의 색깔을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가난, 월세방, 아버지의 무능, 엄마의 히스테리, 나의 반항, 철부지 동생의 무고함이, 치우면 치울수록 번져나가는 곰팡이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융합하지 못하고, 독단적인 교실속의 자아가 어쩌면 사회적인 궁핍과 곤란이란 환경속에서 자라났을 수도 있음을 의심케 해준다.  아이의 눈으로 자신의 가족이 그리고 자신이, 이 사회속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는 지하방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묘사하는 모습에선,  작가의 체념과 상실감이 짙게 드리워진다.  유동하는 자아를 감금하고 있던 교실의 하얀벽은 이제 곰팡이가 피어난 벽이 대신한다.

"얼른 돈 벌어서 좋은 데로 가야지", 엄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섯 살 난 동생이 찡찡거리며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엄마는 동생을 안고서 그 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p.97  [붉은 곰팡이]

표제작 <손톱이 자라날때>와 마지막으로 실린 <고누다>는 역시 전편이 갖고 있던 교실안의 무기력과 냉소, 원인없는 증오와 미움이 극단적인 폭력과 환각 살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아 도취에 흠뻑 빠진 아이는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아이들을 할퀴고, 손을 들어 총을 쏘는 모습으로 호흡하는 모든 존재를 환각 살인한다. 이야기는 여느 교실처럼 사소하지만, 주인공의 행동은 캐리커처 처럼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인 폭력의 극단성은 손톱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환상을 통해, 교실안의 1인자를 꿈꾸고 맘에 들지 않는 존재들에게 총을 겨누어 진짜와 가짜를 인위적으로 나누고 상상살인을 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모두가 <붉은 곰팡이>를 제외하면, 소설로서의 서사로 읽힐 수 없는 것들이다.  여느 여고생의 일기장에 실린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미움과 증오의 언설들 같다.  만약, 중편 <붉은 곰팡이>가 아니었다면, 독자로서 화가났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것은 내 독해의 한계일지도 모르지.  내 생각엔  <붉은 곰팡이> 한 편으로도 이 소설집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어찌되었든,  봄바람과 함께 내 영혼에 날아든 우울의 기운이 대책없이 음울한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 휘발되고 말았다. 

굳이 소설속에서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의 학창시절 유동하는 자아는 충분히 능욕을 당했으리라. 그 시절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감수성이 더 예민한 아이들의 고통은 더 심했겠지. 그러면서 아이의 자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생의 어느 시기엔 영혼의 내진 설계가 필요한 법이다. 세상풍파에 쉽게 쓰러지지 않을 그런 웃음과 여유를 영혼에 장착해야 한다. 인간을 어느 시기로 규정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 시절엔 아이였기 때문에 비관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항상 자아는 생안에서 불완전하고 유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봄이 왔다. 우울해서 더 음울한 소설을 읽고 싶었다.  이 마음의 간사로움은 이미 예고된 회복기로 나아갈 것을 부추긴다.   탈탈 털고 일어나야겠다. 따스한 봄볕에 습한 우울을 말리고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 " 사람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떻게 존재할지,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결정을 내린다. "  그러면 이제, 긍정,희망,즐거움,기쁨 이런 단어들을 억지로라도 생각해볼까?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와 하루를 보내는거다.   인내와 성실, 이 추상명사엔 답답하지만 삶의 진실과 결실이 담겨 있음을 믿어야 한다.   쓰나미에 모든게 휩쓸려간 사람들앞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모든 존재들앞에, 우리의 긍정은 당연한 결론이다.  건강히 존재할 수 있음에 우린 여전히 긍정하고, 희망해야 한다.  그게 지금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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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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