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구약은 이천년 전 예수가 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록한 책이다.  반면, 신약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새롭게 약속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유대교는 아직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유대인들이 히틀러에 의해 살육되기 전까지, 그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니고 차별 받은 이유는 단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메시아를 메시아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했다는 것. 즉,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하나의 종교적 관점은 서양 역사속에서 수많은 유태민족의 차별과 비극을 만들어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으로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서 첫 4 권을 4복음서라 하는데, 마태,마가,누가, 요한 복음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3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 한다. 이 세 편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을 내용으로 하며 같은 서술법으로 기록되어 서로 비교 연구되므로 공관복음이라 일컬어진다. 실제로 이 3복음서를 보면, 내용과 서술 방법이 비슷하고, 중복된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같은 듯 하면서도 내용이 다르다. 즉, 앞의 공관복음서에 없는 내용이 삽입돼 있기도 하고, 시간적 순서가 전혀 다르게 기술되기도 한다.  같은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예수의 생애가 왜 다르게 기록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신약성서가 기록된 것이 예수 사후 수십년 후에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오늘날 교회의 초기형태)를 이끈 사도들에 의해 쓰여지고, 또 신자들에 의해 가필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죽음 이후 시간적 공백기가 존재하며, 인간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신약성서 속의 많은 부문이 구약에서 이미 언급하고 예언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것은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일대기 자체가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예수는 유대교를 제외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했던 메시아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는 이천년 전 베들레헴이란 이스라엘의 작은 촌락에서 마리아를 모태로 해서 태어난 분명한 사람이며, 또한 그 시대의 유대인들과 교류했던 역사적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상당히 빈약하다. 성경속에서 예수의 소년기나 청년기의 삶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하므로, 예수의 삶은 어떻게든 주어진 텍스트(성경)와 그 당시의 역사서를 가지고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카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큰 뼈대안에서 예수의 삶 전체에 살을 붙여 소설가적 상상력을 통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복원하려고 한 책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서 예비한 메시아다.  4복음서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가 진실이며, 그리고 말씀 하나하나는 메시아의 숨결이 실려 있는 구원의 메세지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는 기적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의문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기적과 이적을 행했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해서 허망하게 힘한번 못써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고 그의 기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기적의 증인들이 예수가 체포되자 기다렸단 듯이 줄행랑을 놓고, 새벽 닭이 울기전 예수의 애제자 베드로는 그를 세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이라며, 부인한다.   서양의 기독교 역사나 동양의 기독교 유입역사를 보면, 오직 예수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자들은 십자가형보다 더 가혹한 형을 받고 고문을 당했어도, 신앙을 져버리지 않았다.  예수의 얼굴조차 모르는 이나 예수의 기적 한번 본적이 없는 신도들도, 신앙을 지키며 순교할 수 있었는데 그 시절 제자들은 모두 단합이라도 한듯, 예수를 배반한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의 조그만 촌락에서 태어나 로마라는 역사상의 일시적 권력앞에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유대민족을 위해 예수는 이땅에 메시아로 오셨다. 그러나 적어도 인류의 구원자라면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갖는 민족이나 시대에 태어나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정말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인가 ? 그렇다면 나머지 수많은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걸까?  왜 예수는 흑인이나 동양인이 아니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야 했을까?  40억년 이라는 지구 역사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우주의 역사 가운데 예수는 겨우 2천년전 유대의 그 조그만 촌락에 태어나, 성인기의 2~3년간을 유대민중에게 가르침을 남기고 무력하게 죽었다.  그 사건이 그 당시나 지금의 세계 시민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가 진정 메시아로서 인류에게 합당한 대우를받을만한 필연이라도 있는가?

오늘날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구약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힘있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신약의 예수를 한갓 정치적 혁명가나 분파적인 종교지도자로 치부하고 있다.  예수는 진정,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유대 시대에 정치적 야망을 품었던 한 사람의 혁명가에 지나지 않는걸까? 

"다시 말해 예수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외모에 있어서나 이름에 있어서나 결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었고, 삶을 영위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예수가 유대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그 시대 병자와 곤궁하고 가난한 자들을 치료하고 돕기 위해, 이 땅에 온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때문에 이 땅에 왔고, 무엇을 가르쳤는가?  엔도 슈사쿠에 의하면, 그는 사람들의 현재적 필요에 의해,  기적을 배풀고, 이적을 행하고, 산상설교를 하며, 세상을 주유한게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반로마 과격파인 열심당원이나 유대권력을 잡고 있는 바리세인과 사두개인들의 바람처럼, 자신들을 일시에 해방시킬 그러한 메시아, 즉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인 유대민족의 영원한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절대자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한갓 민족적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 옹졸한 메시아인 것이다. 

현재의 자신들의 곤궁함을 일시에 날려버리고, 유대민중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앞에 서서, 예수는 그 유명한 산상설교를 시작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이에게 은혜를 베풀라. 너를 저주하는 이도 축복하라. 너를 모함하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 속옷마저 내주어라."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아마도, 이 말을 듣던  민중은 잠에서 깨듯 그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났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왜냐하면, 민중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본 모습은 이런 나약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다는 예수, 그의 말 한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 당장에 필요한 식량, 돈, 건강, 민중이 원하는 것은 현재적 필요성이었고, 소위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개인과 민족의 소망을 이루어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마법사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가르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인간의 본성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을 기뻐하며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라니 ? 역설인가?  어떻게 나를 모함하는 사람을 위해 모략이 아닌 기도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  이 가르침의 독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비밀은 사랑에 있었다, 고 엔도 슈사쿠는 결론 짓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 이것이 예수의 생애를 일관하는 요소이다."  p.53 ,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예수가 인류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사랑의 위대함과 민중들이 그리고 있었던 메시아 상(像)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 신약성서속 수난 사화의 핵심이다.  예수는 초반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메시아로 숭앙 받는다. 그가 기적을 보이고 이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 권력에 칼로 맞서지 않으려 했던 예수는 로마라는 지배적 권력과 유대의회라는 민족적 권력앞에 오직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맞섰다. 결국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로마 병사에 체포당하는 무력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조차 옆의 강도에게 조롱을 당한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누가복음 23장 39절 

예수가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줄행랑을 놓았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의 마지막 순간 땅이 꺼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무덤이 열렸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는 요한복음에는 어떤 특이한 현상도 기록되지 않음을 예로 들어, 어쩌면 공관복음서의 내용이란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고백 가운데 삽입된 부분이 아닌가, 추론한다. 즉, 예수가 죽은 후 그 골고다 언덕은 그저 침묵과 평범함이 뒤덮였을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그날, 평범하게 인간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땅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시아의 죽음은 초라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다.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적는다.

"만일 우리가 성서를 예수 중심이라는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라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으면 그 테마는 단 하나, 겁쟁이, 비겁자, 몹쓸 인간이 어떻게 해서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으로 귀착된다.  더불어 그 불가사의한 제자들의 변화의 원인이야말로 성서가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테마이자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5,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형편없는 제자들, 겁쟁이 제자들.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겁하고 비열했던 제자들. 그러나 그 제자들이 이윽고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로 바뀌어 간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성서의 테마의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p.158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성서만을 통해 그 당시 예수의 역사적 현장을 추론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어떤 성서학자는 "축구 경기가 끝난 잔디밭 위의 발자국을 통해, 그 날의 축구 경기를 재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역사 자료를 통해서나 심지어 성경을 통해서도,  그 당시 예수의 정확한 흔적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이천년전 이땅에 분명히 존재했던 한 인간이며, 복음서에 남겨진 그의 어록을 추론한다면 그가 인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알 수 있다.  겁쟁이 비겁자에 지나지 않은 제자들이 한결같이 예수 사후, 예수보다 더 고통스런 방법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생겨 났을까?  부활의 신화속에서 예수를 보았을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그 누구도 마지막 순간까지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남겨진 이들의 삶을 걱정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4복음서 안에서 신비화 된 예수가 아닌 신비의 장막을 걷고 난 후의 예수의 삶을 담백하게 그려낸 책이다. 그의 삶 자체가 기적과 이적으로만 도배된 신화였다면, 그는 무력하게 체포되고, 로마와 유대 권력앞에서 모욕당하고,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강도들에게 조롱당하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스토리는 성서속에 나올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성서속의 예수는 신이면서 동시에 나약한 인간이라는 동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동시성이 예수의 실제를 강력히 증거한다.   그는 지구라는 대지를 걷고 30여년 가까이 이 땅에서 인류와 함께 생활했던 분명한 사람이다.  그는 끝까지 사람으로 존재하며, 신의 가장 큰 가르침을 인류에게 영원토록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그가 가르쳐주고자 했던 사랑은 도대체 이천년 전 유대땅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나 어떤 의미로 남는가?  내일이면, 내년이면, 경제 때문에 지구가 멸망이라도 당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요즘, 대체 이천년전 예수가 가르쳤던 사랑은 이 시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엔도 슈사쿠는 성서와 예수의 생애를 사실과 진실로 나누어 설명한다.  신약성서에 기록된 단편적인 부분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예수의 기적들은 그 지역의 오래된 민담을 후대에 조합한 것이란 얘기들도 있고, 신약성서 속에서 메시아로서 예수가 그려지는 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을 그대로 베낀 것들이란 의심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의 기본 테마는 변질될 수 없다.

그는 무력한 자가 행복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가르친 사랑은 현실에선 무력했다.  자신조차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이란 인간을 굴종시킬 수 있지만 절대로 마음속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영혼을 흔드는 힘은 외부적 권력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울림에서 온다.  예수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라고 말했다.  권력은 한시적이지만, 사랑의 힘은 영원하다. 

신약성서의 진실은 사랑의 위대함이다. 예수는 사랑을 위해 순교했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보며 증오가 아닌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배반하는 애제자들을 보면서도, 죄없는 누명을 씌어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이들을 향해서도,  증오의 목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십자가 아래서,  자신을 조롱하는 인간들을 향해 연민의 감정을 갖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는 이 죽음의 의미를 묻는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가르치고자 했던 사랑의 의미를 탐구한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행한 많은 시각적인 기적들이 있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는 사랑만이 세상을 변화시킨 예수의 단 하나의 기적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200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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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동 2019-08-0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맞춤법이나 좀 잘 쓰세요. ‘제작년‘이 아니라 ‘재작년‘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