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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디자인 산책 ㅣ 디자인 산책 시리즈 1
안애경 지음 / 나무수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막 손에서 놓아 옆에 자리하고 있는 책 한 권을 보며, 또다시 마음이 두근두근한다. 책에서 오는 좋은 기운 탓일게다... 표지의 자작나무 무리가 더할나위없이 디자인적(? 이런 표현 가능한지? 아름다운 북디자인이란 뜻이다)인데, 그 사진의 자작나무가 바로 핀란드를 상징하며 혹독한 추위와 그 속의 고요를, 자연에 순응하는 삶과 조화로운 생활을 생각하게 한다. <핀란드 디자인 산책>, 이 책에 첫 리뷰를 달게 된 것이 더없이 즐겁다.
핀란드.
내게는 자작나무 숲, 수많은 호수, 백야, 산타클로스, 노키아 휴대폰, 고르게 우수한 성과를 내는 이상적인 교육, 사우나, 시벨리우스,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유리공예품, 들의 이미지였다. 본 적이 없는 노키아를 빼고는, 모두 아름다운 이미지들이다.
디자인.
나는 생활 속의 디자인에 특히 공감한다. 일상의 삶과 유리되지 않는, 일상의 삶 자체를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디자인의 힘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일상의 삶과 유리되어 박제화된, 전시장에서만 빛을 발하는 작품은 내 관심의 영역에서 별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적인 도구와 재료를 써서 삶을 디자인하는 작업-혹은 놀이-을 즐긴다. 필요에 의해 공간을 살려내고 빛나게 하는 일이 내겐 흥미롭다. 평범 소박한 삶이지만 그것으로 재미있어지는 삶이다. 디자인은 여러가지로 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산책.
늘, 마음에 담아두는 아름다운 언어다. 보통의 인간이 구가하고자 하는 '1/3의 일하는 시간, 1/3의 잠-휴식의 시간, 1/3의 놀이하는 시간'의 원칙에서 볼 때, 산책은 그 어디에도 쉽게 들어가지 않는 시간이다. 그것은 놀이라고 하기에는 관조적이며,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적극적이다. 물론 일이라고 하기에는 여유롭고 평화롭다. 그것은 24시간 중의 어느 틈새의 시간에 존재하는 특별한 무엇이리라. 산책은 명상과 관조를, 때로는 편안하고 무심한 관찰을 동반한다. 산책은, 자연의 그늘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행위이다.
그래서, <핀란드 디자인 산책>이라는 책, 덥석 집어들어야 했다. 내게는 이 아름다운 단어들의 조합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렸는지 모른다. 지은이도, 내용도 모르는 채 먼저 보고 싶었다.
핀란드에서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안애경 씨가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1, 핀란드는 일상이 디자인이다: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디자인의 감수성을 작품들의 사진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짧고 툭툭 끊어진다. 마치 우연히 접하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붙들고 이야기하다가 길을 나서면 그곳에서 눈에 띄는 것들을 다시 붙들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그녀는 마치 핀란드를 가이드하듯 여기저기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눈에 띄는 것마다 이야기를 풀어놓기를 즐기는 것 같다. 이 장의 소제목들은 '겨울 산책길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 '봄의 문턱에서'... 이런 것들이다.
2. 핀란드 공공디자인의 의미: 인솔자가 그에게 이끌려 다니는 한 무리들을 아예 자리에 앉혀놓고 조금 정색을 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도시 계획과 공공 건축, 전통을 허물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완하며 이어가는 핀란드식 삶의 모습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다. 그 속에 많은 사진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놀라울만큼 아름다운 건물들 몇과 옛 주거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도심의 휴식 공간, 교통 체계과 같은 인프라에 담긴 정신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안정을 찾고 점점 흥미로와진다. 내가 공공 디자인과 건축에 조금은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2장 전체를 보고 나니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책의 분량과 배분이 그러하겠지만, 시작했으니 좀더 본론으로 깊이 들어가고 싶은데 끝나니 아쉬운 지경이었다.
3.핀란드 사람, 그리고 디자인 철학: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슬쩍 보여주고, 그들의 문화와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철학도 잠깐 소개한다. 지은이는 이미 핀란드 현지의 여러 지인과 오래간 교류한 터이니, 그들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이다가 때론 함께 누리는 생활자이기도 하다. 그것은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어서 좀더 침착하고 편안하다.
대체로,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의 체계 같은 것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가적인 감성이 지은이의 목소리 곳곳에서 분출하듯 튀어나온다. 1장에서는 그게 약간 어수선한 느낌을 주어서 오히려 책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약간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읽게 되었다. 그렇게 들쭉날쭉하는 이야기에 약간 적응도 되고 싫증도 날 무렵, 2장이 다가왔다.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식으로 내게 나름의 균형을 요구했다. 곧 즐거운 균형이 되었다. 지은이의 예민한 감성이 묻어나는 발언 곳곳에 핀란드적인 사고에 대한 깊은 공감이 느껴진다. 실은,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게 될 내용들이지 않을까.
'다이내믹 코리아'가 한국의 힘이라고들 한다. 정말로 그건 뭘까, 라는 생각이 이 책을 보는 동안 불쑥 떠오른다. 어쩐지 너무나 쉽게 바꿔치워 과거를 잃어버린다는 것, 뒤돌아봄 없이 앞으로만 달려나가야 하니까 멈춰 설 틈도 없다는 것, 함께 한 발을 딛기 보다는 나 혼자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더 나은 생존의 기술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 살아간다는 것, 이런 얄팍한 생존의 기술을 살짝 컬러풀하게 포장해버리는 단어의 기술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혹은 책갈피 곳곳의 담담한 서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건 이곳이나 저곳이나 마찬가지일지언정,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확실히 달라보인다. 일단 가고있는 길은 차이가 있다. 때로는 잠시 멈춰서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타인을 지켜보는 일이 필요하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헬싱키 시는 100년 전후를 생각하며 도시계획을 세워나가고 있다. 도시 마스터 플랜을 재정비하는 데만 30년이 걸렸다.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도 참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계획을 재검토한다. 마스터 플랜을 시각적인 그림으로 확인하게 되면 사람들은 앞으로의 변화를 실감한다. 계획이 실현되려면 지금까지 진행된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변화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도시의 변화는 사람들 개인의 이익과는 무관한 일이며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뿐이다.' -144쪽
'핀란드는 사실 소비성 물질이 풍부하지 않다. 화학 섬유를 생산하는 공장도 없다. 자연환경과 사람의 건강을 해치는 일은 국가가 우선적으로 제한하며, 엄격한 원칙 적용에 의해 편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사람들이 환경을 생각하고 새로 만들어 내는 자원이 아니라 자연에서 그리고 넘치는 쓰레기를 보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사회 분위기를 갖추었다. 사실은 까다로운 제한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 스스로 자연 그 자체에 이미 많은 자원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 -78쪽
'곳곳에 사람들이 쉬어갈 만한 벤치들이 공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놓여 있다. 간결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은 모두를 배려한 디자인이다. 공공장소에 놓이는 벤치들은 도시계획에 포함되며 디자인을 하기 전 담당 공무원은 현장 조사를 수없이 많이 한다. 어떤 연령의 사람들이 사용하는지 반복해서 관찰한 후에 디자인을 생각한다. 한번 디자인이 결정되면 다시 바꾸기 어려우니 그 전에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디자인이 결정되더라도 바꾸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전히 도시 공원의 여기저기서 낡고 오래된 벤치들을 그대로 사용한다. 새것보다는 있는 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더 많이 고민한다.' -157쪽
'예술은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을 살아갈수록 점점 더 느낀다. 핀란드 사람들은 예술과 디자인에도 실용성이라는 리얼리티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난 이런 삶의 배경에서 사람들 누구나 예술가이고 디자이너이며 철학자임을 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280쪽
이렇게 인식하고 사유하는 지은이는 마지막으로 '나 홀로 벤치'에서 에필로그를 쓴다. 한 권의 책에서 지은이의 감성과 사유를 공감하며 그가 보여주고 소개하는 것들을 사진으로 글로 보고 읽으며 나 또한 지나왔다. ... 산책해 왔다. 안애경씨가 나에게 보여준 핀란드의 느리고 정직하고 조화로운 호흡을 내 삶 속에서도 공유하고 싶다. 언젠가 나 또한 직접 핀란드를 체험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에필로그에 공감한다. 지은이가 사유한 핀란드의 한 단면일지언정, 아래의 말들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난 핀란드 사람들에게서 그 고독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말 없이 인간 내면으로 고독을 받아들인다. 고독 속으로 철저하게 빠져들며 고독과 친구가 되어 고독을 즐긴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 고독은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사람 사이를 더욱 안전한 거리감으로 지켜준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신뢰의 공간이고 정신적 안정을 갖는 공간이며, 마음을 담은 공간이다. ... 적어도 내가 공감하는 핀란드 사람들의 공간 개념은 그래서 서로 침묵하는 시간을 유지한다. 사람들이 침묵의 공간을 두고 그 안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시간을 서로 인정한다.
난 핀란드에서 채우는 공간보다는 비우는 공간 디자인에 대한 철학을 더욱 심도 있게 보게 된다. 섣불리 채우는 공간보다 비워 두는 공간에 대한 디자인 생각을 한다. 고독한 사람들에게서 보는 공간 개념이다.'
한 가지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본문의 활자체가 계속 내용에서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이다. 자꾸만 내용을 규정짓고자 하는 활자체라고 해야할까, 한 권의 책을 편안히 길게 읽게하기보다는 짧은 단문을 여러 편 붙여놓은 느낌으로 읽게해서, 그게 내게는 글읽기에 약간 방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