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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 우리 옛이야기 ㅣ 곧은나무 그림책 16
서정오 글, 이영경 그림 / 곧은나무(삼성출판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부가 살았는데,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이를 못 낳았어. 그래서 뒷산 신령님께 빌었지.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옛이야기 그대로이다. 서정오님의 옛이야기 말 품새야 이미 한 전형이 되었으니 익숙하다. 술술 읽히고 편안한 입말체의 이야기투다.
이야기는 ‘아이 중의 아이’인 주먹이의 예기치 않은 모험을 따라 흐른다. 일단은 신기한 이야기, 어디를 봐도 약자인 꼬마 주먹이한테 감정이입이 가능한 상황, 모험은 흥미진진하고 우연이 다행으로 겹치고 결국 해피엔딩.
한바탕 모험 끝에 안전하게 돌아오니 아이들의 ‘모험하고 싶은’ 마음에도, ‘안전하게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도 쏙 들겠다. 교훈 보다는 재미다.
이 책을 이야기로만 본다면 여느 다른 옛이야기하고도, 또는 다른 <주먹이> 그림책하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옛이야기 그림책으로서는 말할 수 없이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역시나 그림에서 온다.
이영경 작가는 이 옛이야기에 새로움을 부여한다. 등장인물은 주먹이와 그 부모님밖에 없는데,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그 옛날이 아니다. 옛이야기 하면 절로 떠오르는 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그러나 이 책 주먹이의 시대는 그저 수십 년 전을 연상하게 하는, 오래되지 않은 '옛날'이다.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는 어느 시점에다 천연스레 펼쳐놓고 있는 옛이야기, 그게 요새는 흔해진 옛이야기 그림책 기획에 새로움을 부여하고 있다.
주먹이는 ‘중’ 자가 한가운데 떡 붙어있는 '추억의' 중학생 교모를 쓰고 있다. 주먹이 엄마는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아직 새댁이었을 때 입었음직한 알록달록 땡땡이 무늬가 프린트된 한복 차림인데다가 파마머리인데 거참 자연스럽다. 우리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에서 본 듯한 모습이라 낯설지 않고 내눈에 익숙하다. 주먹이 아버지는 아예 앞가리마에 포마드를 바른 듯 착 붙인 머리, 아마도 그 당시로는 최신식이었음직한 알록달록 프린트 셔츠에 헐렁한 체크무늬 바지를 입었는데 뒤에 낚시터에서는 아예 ‘빨간 마후라’까지 목에 두르고 있다. 나름 신여성과 모던뽀이 다운 차림. 이게 묘하게 이 책과 어울린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고! 이 그림책을 볼 우리 아이들에게는 낯설지만 궁금하고 이 그림책을 읽고 골라줄 수 있는 어머니들에게는 은근히 향수를 자극할, 그 정도의 옛날. 방 안에는 그 당시 각시가 썼을 듯한 경대, 신문물이었을 라디오, 그리고 공산품으로 등장한 반짇고리가 보인다. 그렇게 시대 설정을 했다. 대체 어떻게 이 시대로 잡을 생각을 했을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옛날로... 이렇게 함으로써 옛이야기는 와락 우리들에게로 다가든다.
옛이야기 그림책의, 새로운 체험이다.
그런 시대 설정이지만, 뒤이어 진행되는 이야기는 주먹이가 낚시터 옆 풀밭을 뛰어다니거나, 황소 뱃속에 들어가거나, 다시 똥무더기에 섞여 나왔다가 솔개한테 채여 하늘로 올라가거나, 물속으로 떨어져 잉어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하는 과정이니 시대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장면들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이 주먹이의 특별한 모험으로 채워지는데 그건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어느새 그 흐름에 생각을 집중하게 된다. 처음에 두드러지던 시대적 배경은 어느새 슬쩍 물러나 주는 것이다. 그렇게 이 놀라운 시도는 그림책에 녹아들어가 있다.
주먹이가 아버지로부터 멀어져 낚시터 풀숲에서 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는 장면을 보면, 맨 왼쪽 한 귀퉁이에 주먹이가 애타게 고함치는 진짜 생생한 표정, 멀찌감치 오른쪽에는 무심한 듯 커다란 눈으로 주먹이를 보는 듯 마는듯한 황소의 얼굴, 그리고 가운데 쪽 저어 뒤로는 아버지가 이제 막 낚시로 잡아올린 물고기를 망태로 담으려는 모습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낚싯줄을 드리우고 가만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역동적인 장면이다. 주먹이가 외치는 소리가 안 들리는 장면 설정으로는 아버지가 조용히 한가롭게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모습보다는 한결 설득력 있다. 게다가 주먹이 주변을 보면 우리에게는 그저 발에 밟힐 만큼 작은 풀일 뿐이지만 주먹이에게는 키만큼 한 풀들이 빽빽하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보이는데 주먹이에게는 안보이는 아버지의 모습도 충분히 개연성을 얻는다. 청개구리 한 마리가 말끄러미 주먹이가 고함치는 걸 지켜보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풀과 함께 황소 뱃속으로 쑥 빨려들어가버린 주먹이는 캄캄한 뱃속에서 무서워하며 주저앉아있지 않고 여기저기 더듬거리며 기어다닌다. 아이니까! 주먹이야말로 아이 중에 아이 아닌가. 이 책을 보는 작은 아이들도 주먹이는 자기보다 더 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먹이가 황소 뱃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기어다니는 장면도 재미있다. 황소는 주먹이 정도가 뱃속에서 이리저리 꼬물거려도 전혀 기별도 안간다는 표정이고, 작가는 주먹이의 상황을 드러내는데 황소의 뱃속을 뭐 생생하게 내장 그대로 보여줘버린다. 소똥 무더기도 푸짐하고, 똥구멍도 왠지 딱 그럴 것 같은 모습이고, 파리가 몇 마리 그 주위로 붕붕 날아다니는 것도 ‘훈훈하다’. ^^
거기서 나왔으니 소똥을 온몸에 묻혔을 주먹이는 쓰다달다 말도 없이 또 아버지를 찾아 옹골차게 달려간다. 얼굴이고 모자고 옷자락이고 손에까지, 소똥이 푸짐하게 묻어있고 그 뒤를 그러니 파리 몇 마리가 똥냄새를 따라 날아가고 있다. 그러다 솔개한테 채여 하늘로 날아오르니 이제 얼떨결에 (아버지 쪽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해져버렸네. 솔개는 주먹이의 바지 멜빵을 발톱에 걸고 있다. 주먹이가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 그 표정도 볼만하다.
그다음, 독수리한테 공격을 받는 바람에 털까지 여럿 뽑혀 날리며 분투한 솔개가 그만 주먹이를 놓쳐버리자, 아래 보이는 강물 속으로 주먹이가 풍덩 떨어지는 장면. 주먹이가 개구리밥이랑 물풀들이 떠 있는 물속으로 쓩 떨어지는데 드디어 소똥들이 그 물에 푸르르 씻겨나간다. 개구리가 놀라 펄쩍 뛰는 모습까지.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주먹이의 모습도 절로 눈이 간다. 그리고 오른쪽에 잉어 등장. 다음 장에서는 잉어 뱃속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주먹이. 그림책은 가득 펼쳐진 상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상황을 계속 진행시켜 보여준다. 물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이야기와 함께 그림도 끊어지지 않고 속도감 있게 진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잉어를 낚아올린 아버지, 뱃속에서 나온 주먹이. 아버지에게나 주먹이에게나 소름이 돋을만큼 심각한 상황일텐데 이야기는 둘의 만남에 집중할 뿐이다. 이러저러하니 이제 다시는 혼자서 멀리 가지 말아라, 그게 다다. 심심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태 감정을 드러냄없이 물 흐르듯 흘러온 이야기에 참 잘 어울린다. 편안한 결말에 웃음이 싱긋.
그림을 다시 보면 두드러져 보이는 아빠의 빨간 마후라와 셋트로 맞춘 듯한 주먹이의 빨간 보자기, 그 위에 중학생 모자, 하하. 대체 어떻게 이런 차림의 주먹이가 가능했던 걸까. 이영경 작가의 그림은 볼수록 절묘하다.
표지, 강아지풀과 쇠뜨기와 나란히 흙 위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볼이 발그레한 주먹이가 비스듬히 선 채 이쪽을 말끄러미 보고 있다. 그 특별한 빨간 보자기에 교모를 쓰고, 평범한 노란 셔츠에 파란 멜빵 바지를 입고 있다. 하얀 고무신은 벗겨지지 말라고 끈으로 질끈 묶어놓았다. 암만 봐도 그림책에서 내가 만난 가장 귀여운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