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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14 - 애장판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두 권, 세 권, 네 권, 다섯 권... 그리고 폐인의 날들.
다시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이걸 보는 동안 마치 열병을 앓듯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다 큰 아이들을 "내일 학교 가야지 뭐하냐, 어서 자라--" 고 재촉을 해서 재워놓고는 기어코 날밤을 새고야 말았던 나흘밤과 하루 낮... 그리고 나선 한 두 주일간을 거의 몽롱한 정신으로 살았던 기억 말이다.
어느 잡지에선가 애장판 유리가면을 소개하는 글을 보고 꼭 보고싶었다. 잘 가는 비디오+만화 가게에 가니 떡하니 이 책들이 좌악 꽂혀있었다. "허걱! 저게 만화책이야? 저게 유리가면이야?" 그리고는 저걸 다 보려면 며칠 날밤을 새야 하나... 재면서 한참을 보냈다. 남들이 촌스럽다는 그림같은 건 전혀 문제가 안 되었고 오로지 그 많은 분량 때문에, 한번 잡으면 식음전폐하고 폐인이 되어버리는 내 기질 때문에 두 학생의 엄마로서 의무를 생각하고 진정 고민했다. 그래서 결국, 딱 두 권만 미리 보자고 마음 먹은 게 위험한 시작이었다. 부질없는 각오였다.
두 손으로 받치고 보기에 너무 무거울 만큼 두꺼운 책, 한 권마다 500쪽을 넘는 그 분량을 단 한 쪽, 단 한 컷도 글자 하나 안 빼고 보느라 정말 마음은 앞서고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첫 날 밤에 두 권을 보고는, 지킬 수 없는 각오는 진작에 포기하는 게 낫다고 단호히 결단을 내리고는 바로 다음을 구하러 갔다. 그래도 다음 날의 일상의 평화를 위해 세 권. 그리고 다시 몽롱하고 현기증이 나는 낮이 지나고 네 권의 밤. 제 9권을 덮을 때 어디선가 환청으로 들리던 꼬끼오 소리. ^^ 우려했던 대로 역시나 나는 폐인이 되었던 거다. 그러나 어디 <유리가면>이 중도 하차를 허용하는 책이던가? 비장한 마음으로 남은 다섯 권을 몽땅 빌렸다. 신새벽 꼬끼오 소리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도 않고 있는데 연 나흘 날밤을 새고 닷새 째 낮에는 아주 식음 전폐하고 앉아서도 읽고 서서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었다. 지금 생각하니 간간이 식구들 밥을 챙겨주기도 하고 실없는 미소를 흘렸던 것도 같다. 그러나 오호 통재라!!
마지막 14권의 중반을 넘어서며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끝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완결이 아니라니... 흑흑. 나중에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이걸 모르고 시작을 하다니... 나는 아둔한 내가 원망스럽다) 14권을 놓으며 나는 그냥 시체처럼 쓰러져 버렸다. 정말 더이상 생각을 말자 라고 최면을 걸면서...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한 보름간을 허공을 짚는 것 같은 날들을 보냈다.
쓰다 보니 이상한, 비장함마저 감도는 "나의 <유리가면> 독파기"처럼 되었는데-- 정말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유쾌하다. 그 최면에 빠진 듯한 상태란, 얼마나 오랜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오던 것이었던가. 생활은 파탄에 이르렀지만 그 무슨 대수랴... 인생에 이런 날들이 어디 몇번이나 주어지던가 말이다. (이런 일들에 대한 부작용으로 우리 아이들이 책을 엄청 싫어하는지도 모른다...T_T)
이 책은 나에게 적어도 두 가지의 커다란 즐거움을 준다. 우선 마야와 아유미라는 대조적인 두 천재가 이끌어가는 줄거리가 진지하고 흥미롭다. 마야를 지켜보면서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알게되는 코지와 마스미의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다. 이야기에 몰입하며 느끼는 이 즐거움에 얹어지는 커다란 덤이 바로 연극이다(가만, 이야기가 덤인지 연극이 덤인지 모르겠다!). 작가가 연극에 깊이 천착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길다란 줄거리 속에 들어앉은 액자들 같은 연극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길다란 금제 허리띠에 알알이 반짝이는 보석이 박혔달까 ^^-- 너무 생생하고 숨가쁘게 진행이 되어서 마치 진짜 한 편의 연극을 보고 난 느낌이 든다. 두 시간 짜리 연극만 본 것도 아니고, 치열한 준비 과정까지를 보게 되니 연극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커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한 축은 순정만화의 틀을 따라, 다른 한 축은 연극이라는 전문적인 분야의 이야기로 조화롭게 이어나가는 솜씨는 작가를 대가의 반열에 올리기에 충분하다.
다시, 폐인의 느낌이 떠오른다. 어떻게 풀릴 지 모르는 줄거리를 기다리는 안타까움을 견딜 수 없어 잊기로 했고, 다행히 그동안 잊었는데... 밀려오는 두려움에 서둘러 필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