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점 반 우리시 그림책 3
이영경 그림, 윤석중 글 / 창비 / 2004년 1월
구판절판


이미 널리 알려져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한 편의 동시를 그림책으로 만든다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일까? 부담이 클 법도 한데 이영경의 솜씨를 보면 절로 탄복할 수밖에 없다. 오래전 <아씨방 일곱동무>를 그림으로 풀어낸 그녀의 솜씨가 다시 생각난다. 동시 넉 점 반은 '아기가 아기가..' 이렇게 시작하지만 그림책 <넉 점 반>은 그 전에도 이야기가 있다. 표지에서부터 아기는 조그맣게 달린 호박을 당기며 지나간다. 잠자리가 날고 멍멍이가 있다. 그리고 면지에서 아기는 호박꽃을 뒤로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중이다. 이렇게 넉넉한 여백에 그 순간이 표현되어있다. 이제 동시가 시작되려는 중이다.

아기가 도착한 곳은 가겟집. 한자를 섞어 손글씨로 쓰인 구복상회, 담배판다는 표시, 철망 상자가 있고 그 옆에 닭 한 마리, 그리고 '닭팝니다'라는 표지. 가게 앞에는 '하-드'라고 적힌 아이스박스일듯 싶은 통도 놓여있다. 복덕방이라 세워진 안내판, 그 옆에 자전거, 가겟집 뒤로 전봇대에 매달린 알전구 가로등. 시대를 내가 태어난 60년대 즈음으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앞선 때로 확 돌리는 풍경, 색감.

구복상회 안에는 어떤 분이 가게를 보고 있을까? 이영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 방 안의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는 오달지다. 달력, 벽시계, 문틀 위의 액자, 방 안의 '꽃가라 오봉^^',성냥통, 주판,..이런 소품들이 모여 그 방을 이룬다. 영감님은 가게만 보는 게 아닌 듯, 연장들을 펼쳐놓고 라디오를 고치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열다 만 문, 창호를 뜷고 발라둔 유리를 통해 영감님을 본다. 그래, 방 안에서도 가게 상황을 쉽게 보려고 그렇게 해두던 걸 본 적이 있다. 너무나 사실적이고, 정겹다. 깨진 귀퉁이에는 종이로 수선을 해두었고.

대사는 한 줄, "넉 점 반이다." 영감님의 시선은 아이가 아니라 앞장에서 걸려있던 시계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댓돌 위에 오두마니 올라앉은 아기, 그리고 슬쩍 궁금했던 가게의 내부 모습. 원기소 광고, 지금이라면 분명 불량식품의 딱지를 면할 수 없을 온갖 알록달록 추억의 과자들, 설탕봉지, 파리채, 그리고 비닐우산...

이제 아기는 "넉 점 반 넉 점 반"을 외우며 간다. 그런데 아기의 시선은 그것과는 상관없다. 구복상회를 나오자 매어있는 닭이 맨 먼저 아기의 시선을 끈다.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외우며 어느새 발 아래 꼬물꼬물 개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어느 집 담장 옆에 접시꽃이 높다랗게 피어있다. 지금도 시골집에 가면 보이는 그런 풍경. 그집 지붕 위에 참새, 처마 밑에는 제비집. 여름이다. 그러나 볼 게 개미만일까? 한참 앉아 개미들이 줄지어 먹이를 집으로 옮기는 걸 구경하던 아기의 호기심은 어느새 날아다니는 잠자리에게로 옮겨간다.

잠자리는 어느새 분꽃으로 날아가고...

아기는다시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아기는 분꽃에 정신이 홀려있지만 저 멀리 아기의 등 뒤로는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조밭 뒤로 쑥스러운 연애를 하는 남녀의 귀여운 당시 모습, 개구짖게 떠들썩하니 농을 걸며 지나가는 교련복에 교모를 쓴 학생들, 도라지꽃 흐드러진 모습.. 아기는 그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분꽃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다.

해가 꼴딱 져버리도록 눈길 가는데로 따라다니다가 이제야 들어오는 길. 이제 보니 아기네 집은 구복상회랑 한 화면에 잡힐 만큼 가깝다. 실개천 하나 있고 그 위에 어른은 그냥 펄쩍 뛰어넘나들 수도 있을 정도의 다리 하나 놓여있다. 구복상회 왼쪽으로 있는 집. 대문 나와 호박넝쿨 얹힌 담을 따라 길 가는 아기를 우리는 표지에서부터 봤다. 그 한걸음의 길을 두고 아기는 그만 오는 길에 눈을 잡아채는 것들을 따라 멀고먼 길을 돌고돌아 세상나들이를 하고 온 셈이다. 가로등 알전구에 불이 켜지고 구복상회 지붕 위로 밤고양이가 뛰어다닌다. 아기를 기다린 듯 멍멍이가 반긴다. 아기를 곁눈으로 보는 구복상회 아저씨는 수리를 모두 마치셨나? ^^

잊지도 않고 "넉 점 반"^^ 손에는 분꽃을 담쑥 들고.

이미 저녁상이 돌고 있다. 엄마는 다 안다는 듯하다. 아기도 그냥 '나 심부름 했다'하는 얼굴. 천연스러움!

'그리고 밥을 다 먹고는, 아기는 이랬습니다.' 까지 보여주는 작가. 동시는 벌써 끝났지만 그림은 그 뒤까지도 보여주고, 그것이 동시의 간결한 아름다움을 거스르지 않고 푸근하다. 이렇게, 동시 한 편에 그림은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어준다. 그 배경은 그 자체로 너무 소담스럽고도 살뜰하여 그새 잊고살던 동시도, 새로 만나는 그림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새로 얻은 느낌마저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