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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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고래>는 거대하고 유장하다. 이야기 속 희극은 짧고 비극은 장대하지만 읽는 동안 행복하다. 읽는 즐거움에 빠져 꼬박 하루를 밥은 먹었는지 볼일은 봤는지 누가 오고 누가 갔는지 기억에도 없다. 오로지 춘희와 금복과 노파, 칼잡이와 걱정과 문씨.. 들이 어른거리며 오갔다. 중반을 넘으며 숨을 돌릴 때 문득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생각났다. 이십년인가 삼십년 전 쯤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느 때인가에 그 책을 읽은 이래 그 책을 떠올려본 기억이 없는데 왜일까.  

끌고가는 이야기는 현실에도 기대있고 설화에도, 신파에도, 무협지에도, 역사에도 기대있다. 현실도 비현실 같고 비현실도 현실 같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막힘도 없이 물살을 타며 흘러간다. 3 세대의 이야기로 이어지니 그물과도 같은 인과의 법칙도 등장한다. 종으로 횡으로 이야기가 도저하다. 작가의 입담과 상상력에 기꺼이 홀려들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리도 재미있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천하 박색의, 복수의 화신인 노파는 그리 살았고 타고난 배포에 열정과 확신의 화신이었던 금복은 또 그리 살게 되었고 오로지 느낌과 일방의 믿음에 기댄 채 삶을 살아낸 춘희는 또또 그리 살다 간 것이다... 모두가 보편성과는 먼 사람들,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더 멀리 더 크게 자신의 생을 키워가는 사람들. 도무지 '부질없음'을 모르는 사람들... 살다보면 부질없다 싶은 순간이 오고 적당히 어울려 살게 되고 피로를 느끼기도 하건만 이들의 생은 마치 거센 물결을 탄 듯 휘몰아친다. 순간 순간 거센 물살에서 언덕받이로 오를 만한 때도 나오건만 그들은 거대한 운명에 휘둘리듯 물살을 탄다. 그들의 생은 자꾸자꾸 커지고 커지고 커지다가, 어느 순간 터져버리고, 끝이 난다. 춘희가 몇 년이 흐를 동안 홀로 벽돌을 굽고, 다시 몇 년이 흐를 동안 계속 홀로 벽돌을 굽고, 또다시 몇 년이 흐를 동안 그녀는 그대로 홀로 벽돌을 구웠고, 그리고 모든 이야기도 끝났다. 그새 마치 이야기가 몸 속으로 흘러들어온 듯, 내 안으로 커다랗고 기다랗고 단단하고 차갑게 반짝이는 고드름들이 자라나 있는 것 같다. 이야기 한 자락에 고드름 하나씩. 그 고드름들은 서서히 녹으며 내 안에서 눈물로 흐를 것인가.. 이야기는 그렇게 내게 저장될 것인가. 

박민규의 입담이 문득 생각났다. 전혀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로만 풀어가되 그 이야기의 기상천외함과 해학이 빛나는 중국 작가 위화를 떠올리게 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오르내리는데 거침없어서인지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도 겹쳤다. 어쨌거나 세 거장을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작가라니, 오호 놀라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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