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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실 아줌마의 가구 찾기 ㅣ 돌개바람 9
박미라 지음, 김중석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혼자 사는 이찬실 아줌마. 혼자 살고 싶거나 사람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혼자 살게 되어버렸다. 결혼하지 않고 엄마랑 살았는데 그만 삼 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 그 뒤 삼 년을 혼자, 고립되어, 오래된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삼 년 전까지 오랫동안 엄마랑 둘이서 살 때조차 이찬실 아줌마가 고립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둘이서만 소통하고 그들의 문은 밖을 향해서가 아니라 안으로만 달려 있었던 것 같다. ‘밖으로 나도는 걸 싫어하던 송정할머니(41쪽)’의 영향일 것이다. 그들 모녀는 바깥 세상에 나가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얼른 집 안에 들어와 둘이서 올망졸망 살아간다. 그들의 이야기는 ‘누가 이사 왔더라, 생긴 게 어떻더라, 슈퍼에서 파는 생선 눈알이 누렇더라, 신발 굽이 닳았는데 어디가 잘 고칠까…’처럼 사람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구경하고 온 이야기들이다. 그 집의 문은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만 열리고 늘 닫혀있는 문이다. 그 문 안에서 그들은 자족하며 살아간다. 문 안에는 아무리 작아도 괜찮은 듯 아기자기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있고, 문 밖 세상은 그저 구경만 해도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찬실 아줌마는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친구도 없었고, 잠깐씩 세상 구경을 하고 돌아와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 입을 다물고 산 게 삼 년. 혼자서 중얼거리며 쓸고 닦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이 모든 낡은 것들이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면서 (실은 이렇게 살고 있는 내 인생이 지긋지긋한 거겠지만) 결별하기로 마음먹는다. ‘모두 새 걸로 바꾸고 말 거야. 그러면 달라진 인생이 내 눈앞에 펼쳐질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럴까.
찬실은 엄마와 함께 한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가구들을 다 버리고 새 집, 새 가구를 장만해서 새 살림을 시작한다. 삼십 년이 넘도록 산 집을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새 집은 찬실이 꿈꾸던 그대로 꾸며진다. 어디에도 싸구려 티가 나지 않고, 촌스럽지 않고, 얼룩 하나 없고 궁상스럽지 않은 모든 것. 그 반들반들하고 세련된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바로 그렇게 만들어 줄 것만 같다. 찬실은 이사 온 첫 날부터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 꿈에 젖지만, 현실은 이해할 수 없게 삐걱거린다. 기대와는 달리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낯설고 불편하다. 하루 이틀 날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해져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된다. 대체 왜? 왜 이 멋진 것들에 적응이 안 되는 거지?
찬실은 변화도 생기도 없는 예전의 그 생활에 짓눌려 있다가 겨우 그걸 떨쳐내 버리지만, 막상 새 것을 맞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찬실은 급작스런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막다른 골목. 찬실은 자신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몸을 맞추기보다는 역시 익숙하고 편한 일, 오래된 것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이찬실 아줌마의 가구 찾기’. 그런데, 어쩔 수 없어서 익숙하고 오래된 것을 찾아 나서게 된 바로 그 일이, 찬실을 세상으로 내민다. 찬실은 세상에 말을 건다. ‘가구를 찾습니다. 연락해 주세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찬실의 본성은 이렇게 눈을 뜬다.
찬실은 원래 고립되어 살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찬실의 성격이 눈에 띈다.
꼬마 이찬실이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던 수십 년 전 어느 봄날이 스쳐갔어요. … 엄마 눈치를 보며 온 세상을 휘젓던 조금 불안하고 들뜨던 봄날을 생각했어요.
“찬실아, 돌아다닐 생각 말고 집에 조신하게 있어라. 세상이 그리 만만한 줄 아냐?” (41쪽)
“엄마, 우리도 강아지 키워요.” 송정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지요. “집 안에 짐승을 키우면 지저분하고, 키우다 정들면 죽을 때 맘고생만 한다.” (73쪽)
‘엄마가 돌아가시면 저 촌스럽고 무거운 농 내다버릴 거야.’ (31쪽)
‘쳇, 원앙세탁소라면서 만날 부부싸움은… 원앙새가 웃겠네.’ (46쪽)
“생각해 보니까 그 할아버지 고맙네. 들여온 건 절대 안 내준다더니. 설마 내가 맘에 들기라도 하신 건가? 호호호.” (85쪽)
이렇듯, 찬실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발랄하고 활동적인 보통 아이였고, 동물이랑 정을 나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다. 아직 엄마가 살아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엄마 돌아가시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불경하다고 죄스러워 하지 않는다. 원앙세탁소 이야기나 ‘할아버지가 내가 맘에 든 건가?’ 하는 대목에선 개구진 모습도 보인다. 세상과 소통하며 사는 게 어려워서 혼자 웅크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찬실에겐 엄하고 스스로에겐 단단했던 송정할머니가 찬실의 ‘세상 밖으로’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찬실은 자신의 무늬를 지워갔던 것. 나중에는 스스로 자신의 무늬가 무엇이었는지, 실로 자신에게 무늬가 있었던 것인지조차 잊고 살게 되었던 것이리라. 그런 찬실에게 어머니와의 사별은 결국 찬실의 숨어있던 본성을 다시 깨우는 계기가 된다. 찬실은 세상 밖으로 나간다. 새집에서 울면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보다 가구를 찾는다는, 스스로 그린 벽보를 붙이러 나가는 ‘두근두근, 이찬실 아줌마’.
찬실이 세상으로 나갔을 때, 다행히 또 당연히(?), 세상은 찬실을 향해 손을 벌려 준다. 유모차 할아버지도, 방방이를 뛰는 아이들도, 화가 아저씨도 또 야채가게 아줌마도 모두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찬실도 그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자라나는 걸 느낀다. 생계에 야무진 야채가게 아줌마에게는 필요 없는 야채까지 사면서 폐 끼치는 미안한 마음을 덜려 하고, 유모차 할아버지께는 ‘뭘 해서 먹고 사시나…’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놀란다. 자기가 남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할아버지한테 김치를 담가 드릴까 고민도 하고, 장롱을 닦는 걸레를 만들어 드리겠다고도 한다. 처음에 얼음과자를 주겠다고 끈적한 손을 내미는 아이를 얼떨결에 뿌리쳐 버린 찬실이 나중에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준비해가서 나눠주기도 한다. 화가 아저씨가 자신의 벽보를 모아두었다는 것을 알고는 긴장해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소탈하고 스스럼없는 태도와 진심어린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여 마침내는 그림도구를 살 준비를 한다. 그게 찬실의 본래 모습이다. 찬실은 그렇게 억지로 닫혀 있던 문을 살그머니 열고 세상으로 나간다. 더 이상 닫아둘 필요가 없는 문이라는 걸 안 순간 찬실은 본성대로 손을 내민다. 원래 인간의 두 손은 하나는 내 가슴에 얹으라고, 다른 하나는 타인을 향해 내밀라고 있는 것이라지 않는가. 그게 참 다행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래, 가구 찾기는 이제 그만둬야겠다.”
찬실에게 필요한 것은 지나온 고립의 세월을 상징하는 오래된 가구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할 새로운 세상인 것이다. 찬실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어쩐지 현실감이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작가가 도식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랑 둘이서 모아놓은 재산이 있다고는 하나 일도 안 하면서 새집과 새 가구를 거침없이 사고 앞으로 먹고 살 걱정도 전혀 하지 않는 아줌마라니…. 그리 보편적이지 않아서 현실감이 없는 상황이 거슬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들었겠지. 이번에 두 번째 책을 읽을 때는, 이미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봐서인지 작가가 의도하는 ‘이야기’가 바로 들어왔다. 한두 가지 어색한 점을 기정사실로 해 두고 보니 펼쳐지는 이야기가 훨씬 좋게 느껴졌다. ‘이찬실 아줌마를 세상에 내보내야지. 아줌마에게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해 줘야지…!’ 이런 다짐을 하며 써 내려갔다는 작가의 말도 마음에 쉽게 다가왔다.
세상이 휙휙 빨리 변해 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가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해. 억지로 외로움을 털어 낼 필요는 없는 거지.
하지만 이찬실 아줌마는 조금 달라. 외로운 시간이 너무나 길어진 거야.
……
오랫동안 혼자서 세상과 담을 쌓은 채 고민하고 슬퍼하다간 정말로 세상이 커다란 곰의 입 속처럼 어둡게 느껴질지도 모르거든. 네게 조용한 힘을 주는 만큼은 외로워해도 좋아. 하지만 네가 힘겨울 만큼 오래도록 외로워해서는 안 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한번 해 볼래?
그래그래, 좋다. 누구나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세상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라고 이렇게 다채롭고 넓은 것 아닐까. ‘은둔형 외톨이’라는 낯선 말에 사무치게 마음이 아팠다는 지은이의 마음을 나도 그렇게 나누어본다.
약간 거슬렸던 것 두엇.
89쪽의 ‘메발톱꽃’은 ‘매발톱꽃’으로 써야 한다.
15쪽의 ‘문꼬리’는 ‘문고리’겠지? 하지만 아줌마가 투덜거리는 이야기니까 일부러 강조해서 그렇게 쓴 것일까? 명확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