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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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가까운 벗이 여행지에서 혹 시간 날 때 읽으라고 그때로서는 제법 신간이었던 이 책을 찔러넣어주었던 것이다. 피렌체에서 로마의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던 것 같다. 책 속의 '너'가 에필로그 '장미 묵주' 편에서 로마로 떠난다는 장면이 나와서 가슴이 덜컹, 했다. 나도 로마로 가고 있는데... 바로 지금. 절묘한 우연에 마음이 설렜다.  

그리고, 로마에서의 첫 날, 아들은, 엄마를 잃었다. 아들과 나는 헤어져서 각자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저녁 어두워진 뒤에야 숙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라는 걸 떠올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이 책을 앞에 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럴 일도 아닌데도 약간 무서웠던 것도 같다.  

이런 에피소드가, 여행지에서 돌아온 뒤, 그만 이 책을 나만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했다. 책의 본질보다 부수적인 데 더 끌려버린 거다.  

며칠 전, 도서관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이 되어 다시 읽게 되었다. 천천히, 여유롭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마치 직선의 책읽기를 나선형으로 바꿔읽듯 둥그렇게 둥그렇게 읽었다. 씁쓸하고 깊은 맛이 우러났다.  

제목 탓일까 홍보 탓일까. 이 책이 위대한 어머니의 헌신성을 더할나위없이 드러내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그것보다도, 어머니 개인의 소중했던 삶의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다 내주었고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삶이어서 위대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힘든 속에서도 어머니가 부여잡았던 것이 자신이라는 존재의 소중함, 스스로 유지하고 싶었던 기품이라는 것이 읽혔다. 불쌍한 나의 어머니- 거기에 집중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아들 둘 딸 둘.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남편, 첫째 딸, 맏아들, 막내 딸이 엄마를 기억하고, 무엇보다 '나'라는 목소리로 엄마인 박소녀가 이야기한다. 어느 날 서울역 지하철에서 남편을 놓쳐버려 식구들을 잃어버린 엄마는, 실제로는 언제나 그들 삶의 중심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한다. 남은 가족들은 각자가 아프게, 힘에 겹게 그들의 엄마를, 아내를 기억한다. 그건 진실한 기억, 사실적인 기억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라는 그물의 무늬를 거쳐 들어온, 자신의 기억일 뿐이지만... 그 기억들,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는 그물의 무늬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독자인 우리는 엄마와 그 식구들의 이야기를 알아가게 된다. 그들이 고통스럽게 더듬는 기억 속에 나와 내 식구와, 내 엄마와 내 형제의 이야기가 겹쳐져서 

소설의 이야기가 또 내 이야기가 되기도 하면서  

씁쓸하고, 쓸쓸해졌다. 내게 박소녀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 내 엄마의 이야기처럼도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상징적이다. 어디까지나 '엄마'가 아니라 '소녀'임을 상기시키려 함일까? 온 식구들이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마치 엄마인 것처럼 대해왔지만, 그녀는 '엄마'이면서 소녀였고, 처녀였고, 한 여인이었다. 엄마에게 부과된 이미지는 실은 모든 여자들에게 감미롭지만 너무나 버겁기도 하다. 나도 엄마가 되어 이미 이십년이 흘러 딸은 어느새 올해로 성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내가 엄마인가? 제대로 된 엄마인가? 하고 있는데. 내 엄마를 생각하면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에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라는 이름은 실제로 때로 말할 수 없이 버겁다. 그러나 어쨌든 나 또한 엄마이지만, 역시나 한 여자이고, 아직도 처녀 때의 나, 소녀적의 나를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주, 나를 엄마로만 대우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엄마도 말이야, 실은 니들처럼 아직도 꿈도 꾸고 있는 진행중인 사람이라구!" 라고 강변한다.  

박소녀씨가, 4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자식과 또 남편과의 관계맺기에서 자신의 말을 해나갈 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때로 남편과도 자식과도 편치 않았으며, 남편의 존재와 상관없이 기댈 수 있는 남자 동무도 있었으며, 어느 땐가는 매몰차게 자식에게도 마음을 탁, 걷어버린다. 그럴 때 그녀는 "니들이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만두지" 하는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식구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한 달에 사십오만원을 내 뜻대로 기품있게 쓰며, 오갈 데 없고 마음 붙일 데 없는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며 살았다. 뇌졸중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있어도 식구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 아픔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배려였겠지만, 식구들은 또 배려로 읽었겠지만, 그녀가 내 아픔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으면서 식구들의 아픔을 언제나 건사하려 했다는 것은 배반적이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서 엄마를, 아내만을 기대하는 식구들에게 그녀는 철저히 엄마가 또 아내가 되어주지만 그녀 자신은 결코 엄마만도 아내만도 아니다. 사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박소녀씨가 깨닫든 깨닫지 못했든,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의 소망과 미래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제발 엄마를 엄마로만 매기지 마! 엄마는 그 사람의 한 가지 속성일 뿐이야. 이 세상의 모든 그녀들은, 엄마이면서 아내면서, 며느리면서 또 일하는 사람이면서, 예전에는 소녀였고 아가씨였고 그때의 꿈을 여전히 잊지않고 있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이먹어가는, 그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인 한 사람이라구... 그녀를 "엄마면서!"라는 말로 옭아매지 말아줘. 그걸 잊지 마. 그래야 나중에 너희들도 슬프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흐름인지 요즘은 확실히 덜하지만, '엄마' 라는 말의 존재감을 살려내고자 너무나도 많은 문학, 미술, 음악과 영화 ..들이 헌신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존재감은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 약간은 부채감을 안겨주면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고, 이 세상의 질서는 그렇게 재편되어 왔다. 그런 흐름은 시들해지다가도 또다시 유행을 타곤 한다. 말하자면 '꺼지지 않는 주제'인 것이다. 그런 중에 이 책은, 새로운 시도이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기억에 매어있다가 불쑥 깨닫기도 한다. "대체 내가 엄마에 대해 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 물음을 던진다. 자식들과 남편이 그 여자의 존재를 자신의 그물로 걸러서 이해하면서 그 너머를 한번도 보려하지 않고 지나와버린 평생, 그들이 문득 그 사실을 깨닫거나 말거나, 그녀는 어쨌든 오롯이 그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 누구도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지만, 박소녀씨가 그녀의 삶을 혼자 묵묵히 살았고, 그 삶은 그래서 스스로 엄정했고 가치있는 것이었다고. 제발 모두들, 너무 늦기 전에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제대로 바라보라고. 가만히 그녀들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눈에 비늘을 떼내고 당신들의 엄마를 들여다보라고.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보라고.  

안타깝고 안타깝다. 내 눈에 그 비늘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뜯고, 나도 엄마를 그렇게 들여다보고 싶다. 너무 일찍 세상을 등져버린 내 엄마와 '그녀의 인생'을 함께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 슬픔을 어이할까. 어리석은 이에게 언제나 깨달음은 너무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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