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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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어야 할 책이 나왔다.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책으로 나와 반갑기 그지없지만, 역시나 현실을 되새겨야 하는 답답한 마음 누를 수 없다. 

학교에서 강요하는(그들은 '규정'이라고 말하겠지만) 특정 종교 의식을 거부할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던 강의석 군이 일호에게 겹친다. 그들은 그저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였고, 두려움보다 용기에 방점을 찍었을 뿐이다. 어딘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해서 말할 거리가 안되기도 하는 일이 또 어딘가에서는 그토록 넘기 어려운 도전이 되기도 한다. 곳곳에 그런 일들이 포진해 있는 세상이다.   

오래전에 조한혜정 교수의 아들인가가,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면서 장문의 사유를 적어 어떤 잡지-아마 '샘이깊은물'이었던가- 에 기고한 걸 본 적이 있다. 조목조목 거침없는 그의 논리는 당당했고 규정을 들먹이는 학교 어른들의 논리는 그 앞에서 얼마나 초라했던가. 그런데 그 초라함이 이렇게 질길 줄이야.

어째서 머리카락의 길이조차(물론 그 머리카락조차 하나의 대표성일 뿐이지만), 자신이 정할 수 없다는 규정을 아직도 그토록 많은 학교들이 고수하고 있는 것일까. 방학이면 숱한 반 친구들이 외국으로 어학 연수를 가는 걸 어느 새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땅에서, 3cm가 넘으면 바리깡으로 무지막지하게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폭력이 어떻게 아직 공존할 수 있다는 건지, 참말 혼란스럽다. 그게 현실이니 어지럽다. 어른이고 아이고, 터널 속에서 뒤엉킨 기분이다.  

일호의 행동은 물론 일호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일호의 가족사와 얽혀있지만, 가족사는 그런 장치로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호기심과 재미를 주는 이야기들이다. 개화파의 이상을 실현한 정도였다는 엄청난 단발령 시행 이래 초대 이발사였던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가업이 일호네 식구의 특별한 이력이다. 철없는(?) 아버지는 그 무엇인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나가 떠돈 것이 이십여 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온 세월이 가족에게는 저마다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 아버지가 어느날 불쑥, 극적으로 '실재'가 된다. 그리고는 그들은 그 오랜 부재를 그토록 슬며시, 순탄하게 채워나간다. 도대체 그런 일이, 그런 사람들이 가능할까 싶게. 그들의 낭만적인 융화는 마치 그림같아서, 실화라기보다는 마치 상징처럼 읽힌다. 그들의 대사도 실제라기보다는 운율과 같다. 이야기에 끌어온 조선시대 한 자락의 힘이었을까, 그 상징같고 운율같은 것들이 내게는 희한하게 그리 버석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러려니, 그러니까 작가가 만들어내는 무늬려니 하고 태평스레 받아들이게 했다.  

학교가 강압하는 일호의 '직접행동'을, 일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자신의 방식으로 지지한다. 그 지지의 힘을 받으며, 일호는 생각하며 그 자리에 서 있는다. 소로의 불복종과 카터의 직접행동의 청소년 버전이랄까. 걱정으로 조마조마하지만 일견 머리가 시원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해결도 다소 낭만적이다. 억압의 최전선이 우연히, 극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다. 그걸 무너뜨리는데는 교장의 과거-청소년기의 기억-를 되살려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너 그 단단한 청대도 유년에는 여린 죽순이었으니... 그건 사실 실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어쩐지 이 책에 어울리는 해결일지도 모르겠다. 먼지에 뒤덮인 채 과거에 덮여 있는 학교 안 이발관, 그 속에서 중학생들의 머리에 별 그림을 그려놓는 세습 이발사, 그 이발사에게 머리에 별을 만들어 달라던 중학생 시절의 교장... 어울린다 어울려. 

그래, 이 이야기는 아직도 이 시대에는 실화가 되기 어려울지도 몰라. 동화로 풀지 않으면 안될 만큼의 난제.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교 1학년생인 송일호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지도.  작가가, 정면으로 보되 너무 무겁도록 정직하지는 않게, 그걸 의도했는지도 알 수 없다.  

오광두라는 존재가 자꾸 걸린다. 매독은 분명하다. 무찔러야 할 적일 뿐이다. 오광두는 뭔가? 그저 노회한 이중성인가? 혹은 허울뿐인 양심의 잔재를 희미한 기억으로 갖고 있는 무력한 어른의 자화상인가? 그가 읽고 있던 노란 책은 또 무엇인가? 일호에게 선물한 책은 또 뭘까? 찜찜하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 그 이상은 아닐지언정, 일호와 그 아버지의 일화는 오쿠다 히데오의 노란 색이 두드러지는 표지 <남쪽으로 튀어>를 연상시킨다. 어딘가, 비슷하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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