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있는 한 사람이 어린 시절을 순전히 회고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 책의 어디에서도 픽션이라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한 인간이 '자연인'이었을 때의 모습을 오롯이 기록한 책이 아닌가.

그이가 제주의 아이로 태어나 자라온 과정은 그대로 제주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룬다. 삶 가운데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현대의 한국인 가운데 몇 있으랴만, 제주 사람들의 삶은 그 가운데서도 툭, 하고 가슴을 내려앉게 한다. 그래서 그이의 이 기록은 절대로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 질곡을 겪은 모든 이들의 기록이 되어 이 책은 그만한 무게를 갖게 되었다.

그에 버금가게 이 책은 경쾌하고 고소하다. 이 책이 택하고 있는 소재가 그 순전한 어린 시절이고 보니, 게다가 작가가 그 무구한 시절을 마치 바로 어제의 일인양, 눈앞의 일인 것처럼 되살려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보니 그 경쾌한 느낌이 생생하다. 맛깔지고 고소하다.

이 책은 아무래도 제주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아니 구비구비 풀어지는 이야기 거개가 제주에서만 말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지고 익숙한 곳으로 알려진 제주, 너나없이 한번씩이라도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되는 제주라는 곳은 얼마나 특별하던가. 그 특별한 곳에서 일어났던 한 어린 사람- 자연의 일부로서-의 보편적인 체험과 특별한 체험들의 이야기가 내게 커다랗게 울린다. 거센 제주의 바람처럼 섬사람들을 휩쓸었던 원망스런 역사의 이야기도, 그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도 점점이 피어나는 여린 꽃, 잎들의 몽글몽글한 이야기도 이 책에서 하나의 소리로 어우러진다. 그 어우러짐이 이 책을 깊되 무겁지 않게, 경쾌하되 가볍지 않게 이끌어가는 힘이 아닌가. 원래 인생이 또한 그러한 것이니.

이런저런 울림 말고 내게는 또다른 큰 울림이 있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제주 말이 내겐 유난히 정답고 생생했다. 제주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남다른 체험이라는 것을 결혼을 하고야 알았다. 결혼한 뒤 남편의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이 계시는 고향땅을 밟은 뒤에야 너무나 특별한 제주의 모습이 보였다. 보이고 또 보인다. 처음에는 거의 외국어이던 제주 말도 이제는 들리다가, 구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글로 써보지는 못했던 그 말들, 글로는 너무 생경할 것만 같던 그 말들을 이리 책에서 보니, 의외로 너무너무 정답다. 마치 내 고향이 그곳인 양 반갑고 익숙하다. 십삼년 세월에 알게 모르게 내 마음도 거기 많이 앉혔나보다. 읽는 내내 남편, 혹은 시부모님과 친척 어른들의 삶과 작가의 삶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도록 몰입할 수 있었던 내게, 특별한 덤까지 하나 주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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