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 - 운영전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1
조현설 지음, 김은정 그림 / 나라말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전국 국어교사 모임 만세! 국어시간에 고전 읽기 만세!! 아무래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대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고전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겨우 교과서에서 홍길동전 한 대목, 춘향전은 또 잔뜩 줄인 줄거리만으로 알게 되고 그다음에는 판소리 그다음에는 영화까지... 하지만 원본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전국 국어교사모임 만세!' 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줄거리로 아니면 다른 형식으로 아는둥 마는둥 하던 우리의 고전을 드디어 원전으로, 운영전처럼 한문으로 된 소설은 수려한 번역으로, 게다가 중간중간 끼어있는 그 시대와 배경 이해하기까지...(중간에 이것이 거슬린다면 나중에 몰아서 읽어봐도 될 듯하다) 드디어 우리 고전을 통째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웬 호사인가 싶지만, 어찌 이런 일이 이제야 일어난단 말인가 하는 아쉬움 섞인 한숨이 동시에 터진다.

운영전, 이름만 들었던 그 이야기를 이리 멋들어진 제목으로 뽑고 내리 이 시리즈의 1, 2권을 써낸 조현설씨는 누구인가. 게다가 이 소설의 내용을 이만큼이나 잘 잡아낸 일러스트레이터는 또 누구인가... 행여 사치로운 책에 대해 탐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의 모양새는 너무나 '적절하게' 아름다워서 어찌 이리 만들었을꼬, 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이런 책을 놓고 국어시간에 함께 읽으며 나눈다는 생각을 하면--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나는 이야기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이 책의 목적과 모양새에 매료되고 말았다. 요즘 어른인 나도 좋지만 요즘 아이들은 정말 좋겠다.

운영과 김진사, 안평대군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안타깝고, 아름다왔다. 한문으로 이런 소설이 씌어진다면 대체 어떤 글자들로 어떤 문장으로 되어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조현설님의 번역은 이 책에서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는 형식을 적절히 고르지 않았나 싶다. 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품위가 흐른다.

왕가의 아들답게 안평대군의 수성궁의 생활은 절도와 위엄이 깃들어있다. 어려서부터 시, 서, 화,악에 모두 능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안평은 그 미학적 완성을 위해 수성궁을 짓고 거기에 궁녀를 들여 교육을 시킨다. 안평의 권위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지만 그 시대로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안평의 이상의 실현을 위한 한 무리의 궁녀들의 삶, 그것을 들여다보며 땅을 치고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정서이다. 운영전의 무대는 바로 그 부당한 중세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어쩔 수 없는 본성에 따라 피어나는 애닯은 사랑의 현장이다. 운명적인 만남이 있고 난 뒤 그 사랑의 당사자들은 금기와 욕망의 아슬아슬한 줄을 탈 수밖에 없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랑이란...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는 법이다.

운영과 김진사가 두 사랑의 주인공이나, 안평과 궁녀 자란과 같은 이들의 몫도 놓칠 수 없는 묘미가 있다. 게다가 초입에 유영이라는 선비를 등장시켜 운영과 김진사의 혼백으로 하여 그 애통한 사연을 풀어놓게 시키는 수법은 지금 봐도 새롭다. 말미에, 그 사연을 속절없이 풀어놓고는 이승의 자취를 털고 천상으로 오르는 운영과 김진사의 사연을 유영이 다 듣고는 그들의 기록인 책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것은 한껏 신비롭기조차 하다.

이리저리 돌아봐도, 운영전의 멋인지 조현설님의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의 멋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중에 오로지 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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