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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의 모험 ㅣ 풀빛 그림 아이 31
이름가르트 루흐트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어느날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달리는데, 국도 위의 나무그림자들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조금 후에 커다란 애벌레가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보았다. 작가는 그때 자신이 어려울 때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R. O. 비머의 시 '풀쐐기가 운 좋게 길을 건너네' 가 생각이 났다. 정말 그 시가 생각날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책이 탄생했다.
멋진 그림과 이야기,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정말 이 그림책이 좋았다. 책에서 그토록 많이 보았던, 고약한 냄새가 나는 빨간 뿔을 무기로 갖고 있을 뿐인 선명한 초록, 빨강, 검정의 산호랑나비 애벌레. 그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애벌레는 그냥 저 건너편의 풍부한 먹이를 보고는 그쪽을 향하지만, 도로와 그 위를 느릿느릿 기어서 지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애벌레였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물론 애벌레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도로에 대해서 알 리가 없다. 그래서 간다. 운 좋게 길을 건너고 그리고 어느날 멋진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다.
우리의 삶도, 비록 도로가 위험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지만, 도대체 얼마나 미지의 것이던가. 그 앞에 도사리고 있을 숱한 위험들, 아픔들을 모르는 채 우리는 그냥 간다. 마치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듯이. 작가가 첫 장에 '길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라고 박아두어서인지, 맨 끝에 시인의 풀쐐기의 시를 보아서인지, 애벌레가 가만 응시하고 있는 그 보랏빛으로 어른거리는 도로가 내 앞에 놓인 삶의 길만 같다. 쌩쌩 달리는 커다란 트럭과 박을 지도 모르는데, 노란 색의 부리를 가진 까만 큰 새가 다가올 지도 모르는데... 무기라고는 고작 빨간 뿔 하나만을 믿으며 간다.
어떤 애벌레는 트럭과 박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노란 부리의 새에게 먹히기도 하리라. 그리고 또 어떤 애벌레는 저너머, 하얀 꽃 피는 풀이파리들을 먹을 수도, 언젠가 아름다운 산호랑나비가 될 수도 있으리라. 내 앞에 어떤 길이 있을지를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앞으로 간다.
산호랑나비 애벌레가 한걸음 한걸음 나가고 있는 모습을, 그 아름다운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받게 되는 책이다. 작가가 의도한 '인생의 길'까지를 보지 않더라도 애벌레의 길, 그것 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답다. 책 맨 뒤,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견실한 예술적 훈련을 통해 자연과 자연의 기적을 정겹고도 놀라운 관찰로 잡아내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자신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기 위해 색채와 형태의 언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이의 특별한 훈련과 공부는 이렇게 깊은 울림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글은, 애벌레를 고요히 바라보는 듯,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씌어져 더 깊은 느낌을 준다. 고요한 관찰자의 시점, 내 삶의 길을 앞에 두고 고즈넉히 보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