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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 한국만화대표선
박흥용 글 그림 / 바다출판사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만화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리저리 다른 일들에 밀리다보면 만화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만다. 만화방에서 빌려 볼 때도 아무래도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다섯 권 이내의 것을 빌리게 되지만, 실은 길고 긴 대하 만화들이 얼마나 재미있던가. 다 볼 수는 없으니 평론가들이 골라준 만화라도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고른 것이 박흥용의 이 만화다. 예전에 대본소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데, 어느새 사라져 빌려볼 곳이 없던 차에 이렇게 호화로운 장정으로 새로 나왔다. 가히 소장용이다. 망설이다가 샀는데... 좋았다.
하지만 하드커버일 필요도 없고, 조금더 낮은 가격으로 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박흥용의 그림을 좋아한다. 세밀한 선으로도 큰 스케일을 느낄 수 있게 그리는 만화가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저번에 대본소에서 빌려본 <내 파란 세이버>에서도, 박흥용은 자기만의 사유를 담은 만화를 보여주었다. 그렇군, 박흥용의 만화는 그의 사유라는 느낌을 준다.
그의 만화는 매순간 이어질 듯 정지한다. 호흡을 멈추고 사유하는 그 순간. 그렇게 독특한 화면을 만드는 만화가라는 것 만으로도 미덥다. 넘치는 만화들이 다들 나름의 색을 갖고 있다하나 남자들은 순정 만화의 주인공을 절대 구분못하고 여자들은 무협 만화의 주인공과 스토리를 극히 혼란스러워 하는 걸 보고 웃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름의 진실이 있는 현상이다. 박흥용의 만화는, 여자들이 보는 만화인가, 남자들이 보는 만화인가, 했을 때 그 구분을 짓기 어려운 경계의 만화이다 (물론, 세간에 회자되는 이야기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의 만화안에는 성장하는 인간과, 역사와, 문학적인 향기와(그는 대사의 절제를 즐긴다), 무엇보다 그림으로 한 승부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듯한 멋진 컷들이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인간의 성찰에만 너무 의존하는 듯한, 어쩌면 고고한 차원에 머물러 붕 뜬 듯 하여 아쉬운 감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간군이 성찰하고 또 성찰한다. 절제하고 또 절제한다. 가끔 숨이 막힐만큼 추상적이다. 역사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개인들은 역사를 벗어난 인물들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다들 형이상학적인 성찰을 하는 바람에 보는 내내 형이하학적으로 땅에 발디딘 주인공의 이야기에 갈증이 났다. 글쎄, 이런 구분이 억지스럽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세권 내내 계속되는 성찰과 깨달음의 분위기는 내게는 좀 무거웠다. 그런 아쉬움이 있었다해도, 박흥용이란 작가의 존재는 아주 흐뭇하다. 그의 유모어도 즐겁고, 넘치지만 않는다면 절제도 기분 좋다. 하여간, 확연히 다른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