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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책 (100쇄 기념판) ㅣ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앤서니 브라운, 맨날 고릴라만 그리더니 이젠 돼지도 그리네! 하면서 본 책이다. 그는 고릴라나 원숭이 등을 주인공 삼아 그리는 걸 많이 봤다. 그러고보니 앤서니 브라운을 처음 접한 것도 바로 <고릴라>다. 몇 년 전 처음 그런 사람을 알았고 그의 작품도 처음 보았다. <고릴라>의 여운이 너무 강해서, 그 이후 본 그의 책들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 <돼지책>으로 인해 오랜만에 한바탕 마음이 풀어졌다.
돼지책. 내용은 인류가 당연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고 (건전하다!)
그림은 앤서니 브라운이 그린 것 표나게 극사실적으로,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리되(보는 것만으로도 작품 감상이다!), 그 사실적인 그림 안에 온갖 비현실적인 위트가 넘친다. 지은이가 하고싶은 말,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은근히 장난스럽게 내비친다. (그의 장난에 함께 뛰어들기만 해도 유쾌하다!)
결론은,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해피엔딩. 혼자 맘고생 몸고생하며 참아내던 사람은 어느날 화끈한 결단을 했고, 덜떨어진 사람들은 실팍하게 자신들의 덜떨어짐을 깨닫고 뉘우치고, 뉘우침 이후의 개과천선은 이제 온 가족의 평화를 위해 필수불가결의 질료가 되고 그 결과 이 집에는 잔잔한 웃음이 피어난다..
이리 적어놓으니 이거야말로 이상적인 그림책이 아닌가! 내용 좋고, 그림 좋고, 유모어가 넘치고 해피엔딩이라는데. 응용할 일만 남았다. 나도 한 집의 주부이고, 거의 모든 집 안의 일은 혼자 다 처리하면서 궁시렁거리길 잘 하는데. 어떤 때는 그냥 궁시렁거리지만 어떤 때는 화를 벅벅 낸다. '이집에는 자기 몸을 건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째 하나밖에 없다냐? 나머지 셋은 모두 그 하나에 빌붙어 산다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항상, 좀더 고차원적으로 좀더 격차를 벌리며 수준높게 그걸 팍, 깨닫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것이 이 책을 보기 '이전'이었고, 이 책을 보고 난 '이후'는 이렇게 변했다. 다시 혼자에게 내맡겨진 집안일에 지치고 온 식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지쳤다 싶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이렇게. 넌지시, 비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돼-지-들-이-야-!!!'
그러고나면, 그들의 코는 슬슬 둥그런 콧구멍이 앞으로 쑥 튀어나오고, 손은 비참하게 두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벽지는 잔잔한 돼지 무늬로 변하고 냄비 손잡이끝에도 돼지 콧구멍 장식이 생겨난다....^^ 돼지책의 위력과 후환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실실 눈치를 보면서 방 정리를 시작하고, 남편은 기껏해야 돼지만 나오던 신문을 접고 하다못해 방걸레라도 들고 들어간다. 나는 속에서 터져나오는 통쾌함을 누르고 잠시라도 숨기느라 애를 쓴다(여기서 웃으면 지고 들어간다). 뭐, 소리지를 필요가 있나? 혼자 우울하게 참을 필요가 있나? 멋진 방법과 웃음까지 선사해준 앤서니 브라운, 정말 고마워요!